
글로벌 전기차 시장 수요 둔화(캐즘)와 거센 보호무역주의에 맞서기 위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기술 한계 극복’이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3사는 3년 만에 지적재산권(특허·IP)을 60% 이상 늘리면서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특허 왕국’으로 거듭날 수 있게 했다.
위기 상황에서도 양적 팽창이 아닌 차세대 배터리 시장 주도권을 쥐기 위한 질적 성장으로 초격차를 확보해 중국 등 경쟁국 및 기업을 압도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견고한 K-배터리 특허 방어막
배터리 산업의 최근 경쟁 양상은 생산능력 확대가 아닌 원천기술에 기반한 특허 전쟁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이에 따라 2022년 말 기준 4만6223건이던 국내 배터리 3사 특허는 지난해 말 7만3982건으로 3년 만에 60.1% 급증했다.
지적재산권의 폭발적 증가는 경쟁국·기업의 무단 기술 도용을 원천 차단하고 글로벌 라이선스 분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막대한 내수 시장과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고 덩치를 키운 중국에 맞서 우리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기술 특허를 선점해 단단한 ‘특허 방어막’을 구축했다.

3사 중 3년간 특허가 가장 많이 늘어난 곳은 LG에너지솔루션이다. 2022년 2만6641개에서 지난해 5만1406개로 2만4765개(93.0%) 늘었다.
같은 기간 삼성SDI는 1만9387개에서 2만1887개로 12.9% 증가했다. 양 사보다 뒤늦게 배터리 산업에 진출한 SK온의 경우 보유 특허 개수가 많지 않은 편이지만 증가율만 보면 가장 높다. 2022년 195개에서 지난해 말 689개로 253.3% 늘었다.
불황에도 멈추지 않는 R&D 투자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의 특허 급증은 불황에도 멈추지 않는 연구개발(R&D) 비용 확대 덕분이다. 전기차 캐즘으로 실적 둔화 압박이 커졌지만 배터리 3사는 더욱 공격적인 투자를 실시하고 있다.
2022년 2조1869억원이던 3사 R&D 비용은 지난해 3조609억원으로 8740억 원(40.0%) 확대됐다. 이 기간 연구개발비를 가장 많이 늘린 곳은 LG에너지솔루션이다. 2022년 8760억원에서 지난해 1조3278억원으로 51.6% 증가했다. R&D에 많은 예산을 집행한 것이 3사 중 특허 건수를 가장 많이 늘린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삼성SDI는 2022년 1조763억원에서 지난해 1조4209억원으로 32.0%, SK온은 2346억원에서 3122억원으로 33.1% 늘었다. 시장에서는 3사 연구개발비가 올해 3조5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본다. 매년 3000억~4000억원 이상을 늘려온데 더해 하반기부터 전기차 시장이 회복될 조짐이 감지되고 있어서다.

NCM 일변도 탈피, 실적 반전 카드 ESS·LFP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의 막대한 연구개발비는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동안은 프리미엄 전기차에 탑재되는 하이니켈 삼원계(NCM) 배터리 시장에 집중해왔지만 이제는 ESS(에너지저장장치)·LFP(리튬인산철) 배터리로 실적 회복과 반전을 꾀한다.
AI(인공지능) 열풍에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고용량·고안전성 ESS 중요성이 커지는 추세다. 또 전기차 대중화를 이끌 보급형 모델에는 NCM보다 가격이 저렴한 LFP 배터리가 주로 탑재된다.
배터리 3사는 NCM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도화한 패키징 솔루션과 안전성을 대폭 개선한 하이엔드 ESS 전용 배터리와 차세대 K-LFP 제품 특허를 쏟아내며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7만건이 넘는 특허와 3조원대 R&D 투자는 K-배터리가 캐즘 절벽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가장 확실한 무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저가 물량 공세에 맞서 단기적 출혈 경쟁에 뛰어들기보다는 압도적인 특허 자산을 무기로 진입장벽을 높이는 것이 K-배터리의 근본적인 생존 전략”이라며 “현재 쏟아붓는 수조원의 R&D 투자는 보릿고개를 지나 다가올 전기차 2.0 시대와 ESS 시장 폭발기에 국내 기업이 글로벌 표준과 시장을 선점하는 강력한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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