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위선에 알리바이 제공한 정치 팬덤
巨野 폭주의 든든한 뒷배…이 대표조차 어쩌지 못해
(시사저널=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2004년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인터넷에선 야당인 한나라당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진보진영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용자 중 대다수가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디시인사이드 '정치, 사회갤러리'(정사갤)였다.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정치권을 향해 목소리 내고자 했던 네티즌 상당수가 '정사갤'로 집결했다. 노 대통령 탄핵에 분개한 그들은 그해 4월15일 열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복수를 다짐했다. "투표로 한나라당을 심판하자"며 투표 독려 운동을 진행했다. 노래와 각종 '짤방'(이미지 합성물)을 생성해 배포했다. 이른바 '투표부대'로 불렸던 그들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신생 여당 열린우리당은 단숨에 과반 승리를 거뒀다. 당사(黨史)에서 유일한 승리였다.
인터넷 문화가 피어나던 시절 온라인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참여를 이끄는 공간이었다. 신문, 방송 등 레거시 미디어에서 열세에 놓였다고 판단한 진보진영은 인터넷에서 적극적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김어준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1998년 그의 개인 홈페이지 정도에 불과했던 '딴지일보'는 2000년대 들어 인터넷 매체로 성장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2010년대에는 그 유명한 '나는 꼼수다'로 거듭나며 진보진영의 대표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그때의 2030은 이제 4050이 됐다. 2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건 그들이 여전히 민주당계 정당의 핵심 지지층이라는 사실이다. 한국갤럽이 9월26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40대의 절반 이상이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했다(더불어민주당 44%, 조국혁신당 7%). 국민의힘 지지율(20%)은 그 반에도 못 미쳤다. 50대에서도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율 합(민주당 33%, 혁신당 15%)이 국민의힘(29%)을 크게 앞섰다. 2012년 제18대 대선 당시 50대의 몰표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승리했던 사실을 떠올려보면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민심'보다는 '개딸' 여론 중시하는 제1야당
오늘날 진보진영 핵심 지지층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를 '힙(hip)하게' 배운 세대라는 점이다. 이들은 인터넷 정치참여 1세대다. 팬덤정치도 이들로부터 시작됐다.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게 몸에 뱄다. '나꼼수' 등 각종 팟캐스트에서 '조롱의 미학'을 체득하기도 했다. 중년의 나이에 '수박' '왕수박' '아기수박' 같은 분류를 해가며 상대를 조롱하는 유머 코드는 이런 과거에서 비롯된다.
인터넷에서 자발적으로 뭉친 이들 정치 팬덤은 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지난 8월 있었던 민주당 전당대회다. 정봉주 당시 최고위원 후보는 유일한 원외 인사였음에도 초반 1위를 달렸다. '나꼼수' 시절의 공격수 이미지와 거듭된 공천 탈락에 따른 지지층의 부채 의식이 더해진 덕분이다. 김민석 후보가 부상하고 난 뒤에도 그는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런데 "내가 최고위원이 되면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라"는 그의 발언이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지지층은 이재명 대표를 향한 그의 충성심에 의구심을 품었다. 정 후보는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단번에 당선권 밖으로 밀려났다. 20여 년 전부터 인터넷과 뉴미디어로 훈련된 정치 팬덤의 위력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자발적으로 결집해 있는 정치 팬덤은 민주당에 편리한 도구였다.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기존 원칙을 뒤집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하는 순간마다 당원들에게 의사를 물어왔다. 2020년 총선에서 위성 비례정당을 창당할 때나 2021년 4·7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부산시장 후보를 배출할 때가 그랬다. 참여라는 명목은 그들의 위선적 의사결정에 면피용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어찌 됐든 당원들의 자발적 의사결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강성 당원들은 민주당이 무슨 짓을 하든 지지하는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 민주당도 그걸 믿고 폭주한다. 입법 강행이나 '탄핵 여론몰이'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여야 합의를 파기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국가인권위원 선출 논란이 그렇다. 민주당이 야당 몫의 인물만 통과시킨 뒤 여당 추천안을 부결시킨 사건은 그들이 정치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민주당에 국민적 비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독주한다고, 정치적 도의를 저버린다고 한들 유튜브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지지층의 찬사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딜레마, 강성 팬덤과 중도층 정서의 충돌
이 대표는 취약한 당내 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당원 주권'을 강조해 왔다. 자신의 지지층에게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결과 국회의장과 원내대표 선거에도 그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게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 대표가 간과한 게 있다. 사실 주체는 그가 아니라 그의 팬덤이라는 것, 자신은 개딸의 주인이 아니라 장기짝이라는 걸 말이다. 이미 이 대표도 개딸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거 당시 추미애 후보가 아닌 우원식 후보가 당선되자 당원 수만 명이 집단 탈당했던 사실이 그걸 여실히 보여준다. 우 의장은 지난 대선 때부터 이 대표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쓴소리 한마디 했다고 '신(新)수박'으로 떠오른 원조 친명 '7인회'의 김영진 의원은 또 어떤가. 이 대표의 팬덤은 원조 친명들마저 내칠 정도로 극단적인 길로 가고 있다.
사법 리스크와 별개로 이 대표는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정치인이다. 대선을 앞두고 중도로의 외연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면모도 부각해야 한다. 그가 세금을 더 걷어야만 하는 '기본사회'를 외치면서 "금투세 유예"를 꺼내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그의 지지층은 생각이 다르다. 반(反)검찰은 이들의 가치관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멀게는 참여정부에서 시작된 검찰과의 악연, 가깝게는 이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의 역사 속에서 더 강한 대결적 정치를 원한다. 사이다 정치의 상징인 이 대표는 그런 점에서 적격 인물이었다.
이러한 지지층의 니즈(욕구)는 향후 이 대표의 중도 외연 확장 행보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대결·청산을 원하는 강성 팬덤의 요구와 대화·실용을 원하는 중도층의 정서는 배치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 가운데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강성 지지층은 그의 약발이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다른 장기짝을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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