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를 모시는 일에도 생색을 내는 자식과 묵묵히 감당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말 없는 자식은 드러나지 않고, 큰소리치는 자식은 효자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래 감춰진 진실은 결국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전북 군산에 사는 유순희 씨는 올해 예순셋입니다. 남편과 함께 군산 공설시장에서 25년 동안 건어물 가게를 하다 몇 해 전 정리했습니다. 순희 씨는 2남 1녀 중 둘째로, 위로는 오빠, 아래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친정엄마는 익산 시골집에서 혼자 지내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엄마는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며 기초연금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렸습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오빠는 명절에나 잠깐 얼굴을 비추었고, 남동생은 부산에 살아 자주 오지 못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의 기대는 늘 오빠에게 쏠렸습니다. 오빠는 서울로 대학을 갔고, 순희 씨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군산 공장에 들어가 오빠 학비를 보탰습니다. 그래도 순희 씨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엔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여겼습니다.

8년 전 겨울, 순희 씨가 친정에 들렀다가 냉장고를 열어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냉장고 안에는 김치 한 통과 된장 한 종지뿐이었습니다. 보일러는 꺼져 있었고, 엄마는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엄마, 오빠가 생활비 보낸다면서요?" 엄마는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명절에 5만 원씩 보내는 게 다다. 사업이 어렵다더라. 너는 오빠한테 아무 말 마라. 장남 체면 깎인다."
그날부터 순희 씨는 매달 30만 원씩 엄마 통장에 용돈을 보냈습니다. 엄마의 부탁대로 오빠와 남동생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게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때도 그 30만 원만큼은 한 달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묵묵히 응원했습니다. "장모님 춥게 지내시는 거 알면서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우리 형편에 맞게 꾸준히만 하자." 가게 장사가 안 되는 달에는 남편이 막노동을 나가 그 30만 원을 채워 주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그 돈으로 보일러를 돌리고, 장을 보고, 병원에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순희 씨가 모르는 사이에 작은 공책 하나를 쓰고 있었습니다. 순희 씨가 보낸 날짜와 금액, 그 돈으로 무엇을 샀는지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사이 오빠는 친척 모임에 나갈 때마다 장남 노릇을 자랑했습니다. "어머니 생활비는 제가 다 챙깁니다. 장남이 해야지 누가 하겠어요." 순희 씨는 그 말을 전해 들을 때마다 속이 끓었지만, 엄마와의 약속 때문에 입을 다물었습니다.
남동생은 그런 오빠를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가끔 순희 씨에게 "누나는 엄마한테 좀 신경 써. 형 혼자 고생하잖아" 하고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순희 씨는 그럴 때마다 "그래, 알았다"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3년 전에는 엄마가 텃밭에서 넘어져 고관절을 다쳤습니다. 한 달 동안 병원을 지킨 사람은 순희 씨였습니다. 오빠는 퇴원하기 전날 홍삼 한 상자를 들고 와 엄마와 사진 한 장을 찍고는 바쁘다며 그날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 사진은 며칠 뒤 친척 단체방에 올라와 "역시 장남"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올가을, 엄마의 팔순 잔치가 익산 시내의 한 한정식집에서 열렸습니다. 친척들과 엄마의 동네 친구분들까지 50명 가까이 모였습니다. 잔치를 준비한 것은 오빠였고, 순희 씨는 그저 오빠가 시키는 대로 떡과 과일을 맞췄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오빠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장남으로서 어머니 생활비를 책임져 왔습니다. 이제 어머니도 연세가 있으시니 시골집은 정리하고 좋은 요양원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집 판 돈은 그동안 어머니를 모신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박수 소리가 나오다 말고 잦아들었습니다.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순희 씨는 그 순간 엄마의 떨리는 손을 보았습니다. 평생 살아온 집을 떠나기 싫다고, 순희 씨에게 몇 번이나 말씀하셨던 엄마였습니다.
오빠 옆에 앉은 올케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몇몇 친척은 "장남이 알아서 하겠지"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남동생마저 "형이 그동안 고생했으니 그럴 만하지"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순희 씨는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빠, 나도 한마디 해도 될까?" 순희 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8년 동안의 이체 내역을 화면에 띄웠습니다. "엄마 생활비는 8년 동안 내가 매달 30만 원씩 보냈어. 모두 2,880만 원이야. 엄마가 오빠 체면 상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야."
잔칫상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오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습니다. "너, 이 자리에서 무슨 소리야. 내가 명절마다 꼬박꼬박…." 그때 엄마가 가방에서 낡은 공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아범아, 그만해라. 너는 지난 8년 동안 명절에 5만 원 보낸 게 다다. 여기 다 적혀 있다. 보일러 기름도, 내 혈압약도 다 순희가 보낸 돈으로 샀다." 엄마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요양원 안 간다. 내 집은 내가 숨 쉬는 동안 내 집이다."

남동생이 오빠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형, 그동안 누나한테 엄마 신경 쓰라고 핀잔준 내가 부끄럽다." 친척 어른들도 하나둘 혀를 찼습니다.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엄마의 큰언니인 이모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순희야, 니가 큰일 했다. 장남이 큰소리치는 것보다 딸이 말없이 지킨 게 백배 낫다." 잔칫상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 순희 씨는 형제들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습니다. 엄마 이름으로 생활비 통장을 하나 만들어 셋이 형편에 맞게 매달 돈을 넣고, 입출금 내역을 가족 단체방에 올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효자인지 말로 하지 말고 통장으로 하자."
남동생은 그 자리에서 매달 20만 원을 넣겠다고 했습니다. 오빠도 한참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서 말을 못 했다. 큰소리친 건 내가 잘못했다. 적게라도 매달 넣으마." 엄마는 그 말에 오빠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형제들의 단체방에는 매달 초 엄마 통장에 들어온 돈과 쓰인 돈이 꼬박꼬박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 순희 씨는 엄마를 모시고 익산 시장 골목의 오래된 비빔밥집에 갔습니다. 콩나물과 고사리, 볶은 고기를 얹은 비빔밥에 맑은 선짓국 한 그릇이 곁들여진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순희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니가 내 딸이라 다행이다." 순희 씨는 웃으며 엄마 그릇에 고기를 덜어 드렸습니다.
고전 소설 『장끼전』의 장끼는 까투리가 불길한 꿈을 꾸었다며 말리는데도 큰소리만 치다가 결국 덫에 걸리고 맙니다. 허세와 큰소리는 잠시 사람들의 눈을 가릴 수 있지만, 진실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부모를 돕는 일은 생색이 아니라 꾸준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가 여럿이라면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서로 알 수 있게 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부모 생활비는 한 통장으로 모으고 기록을 함께 나누세요. 그 투명함이 형제 사이의 오해를 막고, 부모의 마음까지 편하게 합니다.
올가을 순희 씨는 엄마를 모시고 익산 미륵사지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천 년 넘은 석탑 위로 붉은 노을이 번졌고, 넓은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바람에 물결쳤습니다. 엄마는 순희 씨의 팔짱을 끼고 오래도록 그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출처 : '장끼전'
Copyright © 책뭉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