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예금 잔액 990조 시대…자금 쏠림에도 금리는 시들

배현정 2026. 8. 8.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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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으로 역머니무브
[사진 AI 생성이미지]
# 직장인 이모(38)씨는 지난달 말 주식 계좌를 정리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널뛰는 증시에서 손실을 확정하고 뺀 3000만원을 정기예금에 넣으려 재테크 카페와 은행 앱을 뒤졌지만 마땅한 상품을 찾지 못했다. 이 씨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렸다길래 예금 금리도 연 4%대는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찾아보니 3% 초반에 불과했다”며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저축은행에 4%대 중반 상품이 널려 있었다는 글을 보고 허탈했다”고 말했다.

증시 급락에 지친 자금이 원금이 보장되는 은행 예금으로 몰리는 ‘역(逆)머니무브’가 거세지고 있다.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온 돈과 수시입출금 통장에 묶여 있던 대기성 자금이 일제히 정기예금으로 갈아타는 모양새다. 그러나 은행권은 예금 금리를 오히려 내리거나 인상 폭을 최소화하는 데 그쳐, 기준금리 인상 수혜를 기대했던 예금자들의 아쉬움이 깊어지고 있다.

수시입출금 계좌서도 한달새 56조 이탈
은행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지난달 말 정기예금 잔액은 984조9399억원으로 한 달 새 35조5401억원 불어났다. 자금 유입은 이달 들어서도 이어져 지난 6일 991조4441억원까지 늘었다.

돈이 빠져나간 쪽은 수시입출금 계좌다.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수시입출금식예금 포함)은 6월 말 722조2928억원에서 지난달 말 665조8879억원으로 56조4049억원 급감했다. 2019년 관련 집계가 시작된 이후 월 기준 최대 감소 폭으로, 지난 6일에는 664조1401억원까지 줄었다. 증시에서 이탈한 자금뿐 아니라 금리를 좇아 수시입출금 계좌에서 정기예금으로 갈아탄 돈도 상당하다는 의미다.

증시 자금도 마찬가지다. 투자자예탁금은 6월 말 121조6340억원에서 지난달 말 104조1354억원으로 17조4986억원 줄었고, 이달 5일에는 103조2125억원까지 내려앉았다.

그래픽=이윤채 기자
자금은 은행으로 대거 몰렸지만, 금리 경쟁은 시들하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달 16일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3년 6개월 만에 올렸음에도, 일부 예금 금리는 인상 전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특히 저축은행권의 되돌림이 가파르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전국 79개 저축은행이 판매하는 12개월 만기 정기예금 314개 상품의 평균 기본금리는 이달 4일 기준 연 3.80%로 집계됐다. 지난달 8일 연 3.95%까지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0.15%포인트 떨어졌다.

그래픽=이윤채 기자
고금리 상품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기본금리 연 4% 이상 상품은 지난달 16일 173개로 정점을 찍은 뒤 이달 4일 91개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최고 기본금리도 지난달 8일 연 4.60%에서 이달 4일 4.10%로 0.50%포인트 낮아졌다. 지난 6월 1일만 해도 4% 이상 상품이 한 건도 없다가 한 달여 만에 173개까지 늘었던 점을 고려하면 되돌림 속도가 빠르다.

저축은행 관계자는 “금리 인상 전에 하반기 예금 만기와 중도해지, 증시로의 자금 이탈 가능성 등에 대비해 유동성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둔 상태”라며 “일부 저축은행은 필요한 수신 목표를 달성한 데다 대출 영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어서 관망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시중은행도 소폭 인상에 그쳤다. 지난달 초까지 5대 은행 중 정기예금 금리가 연 3%를 넘는 곳은 드물었으나 기준금리 인상 이후 대부분 연 3%대에 올라섰다. 4일 은행연합회 공시 기준 5대 은행의 12개월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연 3.2~3.3% 수준이다. 신한은행 ‘신한마이플러스 정기예금’이 최고 연 3.3%로 가장 높고 농협은행 ‘NH올원e예금’이 연 3.25%로 뒤를 잇는다. KB국민은행 ‘KB스타 정기예금’, 하나은행 ‘하나의 정기예금’, 우리은행 ‘WON플러스예금’은 모두 연 3.2%다. 인상 폭은 기준금리 상승분(0.25%포인트)을 그대로 반영한 수준이다.

글로벌 금리 불안도 안전자산 선호 자극
금리 경쟁이 불붙지 않는 배경에는 막힌 운용처가 있다. 금융당국의 대출 총량 관리가 강화되면서 예금이 들어와도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다. 대출로 나가지 못하고 쌓이는 예금은 은행에 고스란히 이자비용 부담으로 남는다.

지난달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778조7869억원으로 6월 말보다 3조8261억원 증가했다. 주택담보대출이 2조2831억원 늘며 지난해 8월 이후 11개월 만에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하반기 남은 기간 대출 공급을 더 조여야 하는 은행으로서는 예금을 추가로 유치할 유인이 크지 않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권이 시장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려는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대출 운용이 막힌 상태에서 이자를 더 주며 예금을 흡수할 이유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대신 고금리 혜택은 단기 적금이나 파킹통장으로 쏠리고 있다. 우리은행 ‘우리의 소원 적금’은 우대조건을 모두 충족할 경우 6개월 만기 기준 최고 연 8.29%다. 농협은행이 모두투어와 제휴해 1만좌 한정으로 판매하는 ‘NH모두트래블리적금’도 3개월 만기 기준 최고 연 7%대다. 다만 적금은 매달 나눠 넣는 구조여서 실제 받는 이자는 표시금리로 단순 계산한 금액보다 적다.

수시입출금이 가능한 파킹통장도 경쟁이 치열하다. 4일 네이버파이낸셜 집계 기준 광주은행 ‘매일이자Wa파킹통장’이 최고 연 5.1%, SC제일은행 ‘스마트박스통장’과 IBK기업은행 ‘부가세모으기통장’이 각각 연 5.0%다. 저축은행에서는 OK저축은행이 최고 연 7.0%, 대신저축은행이 연 6.0%를 내걸었다. 다만 우대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고 적용 한도도 소액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은행이 단기 상품에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것은 부담을 관리하면서 자금을 붙잡기 위해서다. 정기예금은 가입 시점 금리가 만기까지 적용돼 한 번 올리면 1년 치 이자 부담이 확정되지만, 파킹통장은 변동금리여서 시장 상황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

만기를 짧게 가져가는 편이 유리한 것은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리 인상이 예상되는 국면에서는 장기 예치보다 3~6개월 단기·분할 예치로 금리 변화를 반영하는 전략이 합리적”이라고 조언했다.

향후 예금 금리가 반등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시장 일각에서는 한국은행이 8월에 이어 10월에도 금리를 올려 내년 상반기까지 기준금리가 연 3.50%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글로벌 금리 불안도 안전자산 선호를 자극한다. 지난달 30년 만기 미국 국채금리는 약 20년 만의 최고 수준인 5.24%까지 치솟았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전 세계적인 동시다발적 금리 인상은 거시 경제적 위기 징후로 해석될 수 있다”며 “금리 인상 기조 자체가 위험자산에 부정적인 신호로 작용해 한동안 안전자산으로의 자금 이동이 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배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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