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선 동업으로 윈윈, 한국은 ‘동업상구’ 왜?

황정일.배현정 2024. 10. 5.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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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유독 ‘동업(同業)’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지인이 동업을 한다고 하면 일단 말리고 본다. 오죽하면 동업상구(同業相仇·동업을 하면 원수가 되기 쉽다)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사실 동업은 ‘부족한 것을 보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술이 있는데 자본이 부족하거나, 괜찮은 사업 계획이 있는데 계획을 구현할 기술이 없는 때 동업을 고려하게 된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한국에서는 끝이 좋지 않아 동업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만 동업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급 자동차의 대명사가 된 영국의 롤스로이스나 미국 모터사이클의 상징과도 같은 할리데이비슨, 사실상 전기차 시장을 만들어 낸 미국의 테슬라가 대표적인 예다. 롤스로이스는 1906년 카레이서이자 자동차 수입업자였던 찰스 롤스와 전기 기술자였던 헨리 로이스가 만든 자동차 브랜드다. 업황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롤스로이스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고급 자동차 시장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독특한 엔진·배기음으로 전 세계에 마니아를 둔 할리데이비슨은 윌리엄 S 할리와 아서 데이비드슨이 1903년 설립했다. 테슬라는 2003년 엔지니어인 마틴 에버하드와 마크 타페닝이 창립했다. 이듬해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에 거액을 투자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게 됐고, 이후 창립자들이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머스크가 경영을 맡고 있다. 이 외에도 유럽 최대 규모의 소비재 기업 중 하나인 영국의 유니레버, 이탈리아 패션브랜드 돌체앤가바나 등이 동업으로 시작해 세계적 기업이 된 곳이다.

국내에서는 럭키금성·삼진제약·영풍 등이 대표적인 동업 기업이었다. 두 명이서 혹은 그 이상이 모여 경영, 기술, 자본, 마케팅 등 각자 잘하는 분야를 맡아 공동으로 일군 곳이다. 하지만 한국의 동업 기업 중에는 롤스로이스·할리데이비슨처럼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 거의 없다. 럭키금성은 2005년 GS그룹의 계열 분리를 끝으로 57년여 만에 LG그룹(구씨)과 GS그룹(허씨)으로 나뉘었다.

75년이라는 짧지 않은 동업 역사를 갖고 있는 영풍은 고려아연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든 동업상구의 대표적인 예로 남게 될 전망이다. 한국에서 유독 동업이 쉽지 않은 건 ‘경영 승계’가 많은 한국의 기업 문화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분뿐 아니라 경영권을 가져야만 오로지 ‘내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내 것을 지키려면 반드시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화해 있다”며 “동업이 쉽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결국 ‘내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탐욕이 동업자 간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지분을 똑같이 나눠 갖고 있다 해도 대체로 ‘경영권’을 가진 사람을 ‘오너’(주인)로 인식한다. 그러다 보니 동업자끼리 서로 경영권을 갖겠다고 싸우는 것이다. 김우진 교수는 “그래도 창업주 세대에서는 창업 당시의 마음가짐이나 합의가 지켜지는 편”이라며 “하지만 2세대나 3세대로 넘어오면 여지없이 경영권 싸움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영풍 역시 마찬가지다. 창업주 2·3세대가 영풍의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을 ‘온전히’ 갖기 위해 공개매수를 통해 지분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동업자 집안 간 지분 확보 경쟁은 대개 2세대, 3세대 오너의 무능력이 명분이지만 핵심은 지분율 확대를 통한 경영권 확보”라고 말했다. 지분이 세대를 거쳐 상속되면서 창업주 집안 간 지분율이 달라진 것 등이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3~4세로 넘어오면 지분율이 창업자 대비 떨어지고, 경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이 틈을 노리고 경영권 확보 싸움이 벌어지거나, 적대적 인수·합병(M&A)의 먹잇감이 된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처음부터 전문경영인을 두거나, 이사회를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회사가 매각되거나 부도가 나지 않는 한 동업자 간 약속이 보전되는 예가 많다. 할리데이비슨 역시 실적 악화로 1960년대 매각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전 세계에 열광적인 소비자를 두고 있다. ‘차등의결권’(특정주에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이나 ‘포이즌필’(경영권 침해 시도 때 시가보다 싸게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 등 한국보다 경영권 방어 장치가 많은 것도 경영권 분쟁이 적은 요인으로 꼽힌다.

문제는 동업자 간 분쟁이 아니라, 같은 이유로 한국 기업 상당수가 적대적 M&A에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만약 투기적 자본이 경영권을 위협하게 되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예컨대 고려아연 측의 주장처럼 경영권 확보에 나선 사모펀드가 추후 중국에 회사를 팔아버리면 한국의 기간산업이 고스란히 중국에 넘어가게 된다. 서지용 교수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기업이 평소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 가치를 높여서 적대적 M&A가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오너 후손의 경영 능력이 미흡하다면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는 등의 기업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정일·배현정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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