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주민은 왜 미군보다 일본군이 더 무서웠을까 [책과 세상]
오키나와의 비극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
"피해자보다는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

‘조선·류큐(현 일본 오키나와)인 사절.’
1920~1930년대 일본 본토 식당에 버젓이 내붙었던 이 벽보는 오키나와에 태어나 사는 소설가 메도루마 슌(64)이 고향을 문학으로 써내는 이유를 보여준다. 오키나와는 일본 남서쪽의 독립국 류큐왕국이 1870년대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창지개명(創地改名)된 이름이다. 본토와 다른 외모와 언어를 가진 ‘이등 국민’으로 류큐인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엄혹했다. 태평양전쟁 최대 규모의 전투이자 일본 내 유일한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를 겪은 작가의 할머니는 “미군보다 일본군이 더 무서웠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전쟁으로부터 80년, 여전한 상처

메도루마의 소설집 ‘혼백의 길’은 오키나와 전투를 둘러싼 다섯 가지 단편을 담았다. 전투에서의 적은 미군이지만, 소설 속에서 주민을 가장 괴롭히는 건 우군인 일본군이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식량을 수탈하고 전투에 총동원한다. 미군의 스파이로 몰아 마구잡이로 살해한다. 열다섯 살의 소년병이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동네 친구의 아버지를 스파이로 고발하는 비극(‘척후’)은 이런 상황에서 발아한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로부터 무려 8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혼백의 길’ 주인공 역시 모두 노인이다. 죽음을 앞둔 나이에도 이들은 여전히 그날의 시간에 붙들려 있다. 수록작 ‘신 뱀장어’에서 ‘후미야스’는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한 아버지를 죽인 해군 부대의 대장 ‘아카자키’와 40년 후에 마주친다. 사과를 요구하는 그에게 아카자키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맞선다. 아카자키의 딸도 “아버지는 전쟁 중 오키나와에서 최선을 다하셨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후미야스를 쫓아낸다. 똑같은 일의 반복 앞에 그는 “뭔가 결정적으로 뒤바꿀 힘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중적 피해자'로서의 오키나와

“피해자라기보다 무엇보다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 오키나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구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는 일이다.”
2023년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으로 한국을 찾은 메도루마는 자신이 ‘역사 문제’에 천착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설 바깥에서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와 자위대 기지 강화 반대 운동을 이끌며 현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그는 ‘이중적 가해자’로서의 오키나와의 위치에 주목한다. 그의 신념대로 소설집 ‘혼백의 길’의 오키나와 사람들은 비극적인 전쟁에 휘말린 무고한 피해자만은 아니다.
표제작의 주인공 ‘나’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철수하던 가운데 “죽여 줘”라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포탄 파편에 맞아 죽음을 앞둔 여자의 곁에 엄마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는 아기를 나는 큰 고민 없이 칼로 찔러 죽인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품에 안고 나서야 “내가 한 행동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되뇌인다.
또 다른 소설 ‘이슬’에서 오키나와 항구의 노인 일꾼들이 털어놓는 종군 경험은 피해자의 가해자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키나와 사투리로 이들은 말한다. “엄마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베어 죽이고, 다리를 잡고 휘두르다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는 일도 허다했어. 울고불고하는 사람을 강간하고 집에 불을 질러 산 채로 태워 죽이는 경우도 있었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문장에 덧붙이는 ‘하지만’이라는 접속 부사는 메도루마 문학의 요체다. 작가는 ‘혼백의 길’ 한국어판 서문에 자신의 소설이 “기억을 둘러싼 싸움” 속에서 탄생했다고 썼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를 정당화하려는 역사 왜곡 앞에서 작가가 말하는 약자의 무기는 ‘기억’이다. ‘신 뱀장어’와 ‘버들붕어’는 각각 “잊어서는 안 돼”라는 다짐과 “우리들이 잘 기억하고 있을게요”라는 말로 끝맺는다. 그의 소설은 말하고 있다. 기억하는 한,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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