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된 '관세전쟁'이 인공지능(AI) 반도체 분야로 번지고 있다. 특히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자국 기업인 엔비디아, AMD, 인텔에도 예외없이 강도 높은 규제를 부과하면서 전체 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들 기업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해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직간접적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최근 미국 행정부로부터 H20칩을 중국에 수출하려면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또 이달 14일에는 이 같은 조치가 무기한 적용될 것이라는 추가 통지가 전달됐다.
H20은 미국의 대중국 수출제한 강화 이후 엔비디아가 중국 시장을 겨냥해 만든 제품으로, 중국으로의 합법적인 수출이 가능한 최고 사양의 AI칩이다. 최근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공개한 AI모델에도 이 제품이 활용됐다.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트댄스 등 중국 빅테크 기업들은 올 1~3월 H20을 160억달러(약 23조 원) 이상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 분기 대비 40% 넘게 늘어난 것으로, 미국 수출 규제가 본격화하기 전에 주문량이 몰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H20 수출이 막히면 엔비디아는 올 1분기(회계 기준 2~4월) 실적에 55억달러(약 7조6000억원)의 손실을 반영해야 한다. 수출을 위해 미리 제작한 물량이 재고로 남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최대 경쟁사인 AMD도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공시에서 '중국 수출용으로 설계된 MI308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새로운 미국 수출 규제의 대상이 됐다'며 '해당 제품에 대한 정부의 수출허가를 받지 못할 경우 회사는 8억달러(약 1조1300억원)의 재고, 구매 약정, 관련 준비금을 부담해야한다'고 밝혔다.

로이터에 따르면 인텔 역시 전날 미 당국으로부터 AI가속기 '가우디'를 중국에 수출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인텔 매출에서 가우디가 아직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아 당장 엄청난 손실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가우디를 중심으로 GPU 판매를 늘려가려던 인텔로서는 잠재시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문제는 이들 기업에 HBM을 공급해온 국내 기업들도 피해를 떠안을 수 있다는 것이다. MI308과 H20 탑재되는 HBM3(4세대)과 HBM3E(5세대)의 대부분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급해왔기 때문이다.
HBM은 전체 메모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크지 않지만 수익성이 높아 국내 업체들의 프리미엄 전략의 중요한 축이다. 이번 수출 제한으로 A!칩 시장 전반이 위축될 경우 HBM 수요 감소와 함께 메모리 단가 하락, 패키징 설비 가동률 저하 등 연쇄적인 영향이 우려된다.
특히 장기적 관점에서는 중국의 역량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의 제재가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더욱 강화하고, 나아가 글로벌 AI 시장의 성장세를 꺾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중국은 지난해 5월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3단계를 출범시키고 3440억위안(약 65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 기금 중 대부분은 HBM 개발에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중국 1위 D램 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최근 샘플 HBM 칩을 만들었으며 2026년에는 HBM3, 2027년에는 HBM3E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잇따른 제재로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이번 규제가 길어지면 AI 반도체 시장이 전체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HBM 수요 감소로 이어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사업은 수익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의 의도는 명확하지만, 중국은 때릴수록 강해지는 측면이 있어 자체적으로 첨단 HBM을 개발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권용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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