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건희 회장의 ''거액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대한민국 국민 가수

“흙수저? 아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가황’의 어린 시절”

흔히 나훈아를 ‘흙수저 출신’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1947년 부산에서 태어나, 선원 출신으로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1950년대 이미 집에 축음기가 있을 정도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국회의원까지 지낸 인물로, 나훈아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의사나 판검사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허락도 없이 가수로 데뷔한 아들을 끝내 용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부자간의 갈등은 나훈아 인생의 한으로 남았다.

“뽕짝의 자부심, 클래식 성악가 꿈꿨던 소년”

나훈아는 스스로를 ‘뽕짝 가수’라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뽕짝이야말로 한국인의 영혼을 담은 음악이라며, 이 장르의 자부심을 수차례 밝혀왔다.

실제로 어린 시절의 꿈은 클래식 성악가였지만, 결국 대중가요의 길을 택했다.

1960년대 데뷔 후 ‘뽕짝’이라는 장르에 대한 대중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한국 대중음악의 정수로 승화시켰다.

“싸움도, 기개도 남달랐다…무대 밖의 진짜 사나이”

나훈아는 무대 위의 카리스마뿐 아니라, 실제로도 대쪽 같은 기개와 강인함으로 유명하다.

공연장에 건달들이 몰려와 시비를 걸던 시절, 그는 참지 않고 맞섰다. 왼쪽 뺨에 남아 있는 70바늘 흉터 역시 깨진 병을 들고 덤빈 괴한과 싸우다 생긴 상처다.

경찰 조사만 7번을 받았고, 실제로 괴한을 제압한 일화는 방송인 이상벽이 “무대 연출인 줄 알았다”고 증언할 정도로 전설적이다.

일본 공연에서는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공개적으로 외쳐 일본 우익의 협박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경상도 사투리로 “내가 말한 대로다”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삼성 이건희 회장·북한 김정은·정치권…모두의 초청 거절한 대쪽 기개”

나훈아의 대쪽 같은 기개는 재계와 정치권에서도 유명하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나훈아를 초대했을 때 그는 “나는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노래하니까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표를 끊어라”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2018년 남북평화 협력기원 평양 공연 때는 김정은 위원장의 초청도 정중히 거절했다. 정치계 입문 권유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오직 음악과 대중만을 위해 살아온, 진짜 예술가였다.

“나이를 속였다? 오히려 올려 쓴 프로필의 비밀”

프로필상 1947년생으로 알려진 나훈아는 실제로는 1951년생 동창들이 여럿 있다.

이는 어려 보이기 위해 나이를 낮춘 것이 아니라,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면서 오히려 나이를 올려 표기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작곡·작사 천재…노래방 최다 등록, 2000곡 넘는 음원”

나훈아는 단순히 노래만 잘 부르는 가수가 아니다. 그는 800곡이 넘는 곡을 직접 작곡했고, 노래방에 등록된 곡만 2000곡이 넘는다.

대표곡 ‘땡벌’(강진), ‘당신의 의미’(이자연), ‘여자이니까’(심수봉) 등은 후배 가수에게 곡을 주거나 편곡까지 직접 해주며, 돈도 받지 않고 지원한 미담도 있다.

매년 10곡씩 음원을 발표해도 200년이 걸릴 만큼 방대한 음악적 유산을 남겼다.

“신비주의와 라이벌, 그리고 ‘가황’이라는 별명”

나훈아는 남진과 함께 1960년대부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신비주의적 존재, 중장년층에게는 전설적 가수로 남아 있다.

그는 ‘가황’이라는 별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중은 그를 ‘가황’으로 불렀고, 이는 곧 한국 대중가요의 상징이 됐다.

“은퇴 선언과 팬들의 아쉬움…영원히 남을 ‘가황’의 노래”

몇 년 전 은퇴를 예고했던 나훈아는 최근 실제로 무대를 떠났다.

팬들은 “가요사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가수”, “대쪽 같은 기개와 음악적 업적에 찬사” 등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의 대표곡 ‘영영’의 가사처럼, “잊으라 했는데 잊지 못하는” 팬들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