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정취를 뽐내는 교토, 난젠지를 지키는 거대한 산몬을 만나다

난젠지(南禅寺, なんぜんじ)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어떤 만화책의 부록으로 따라온 일러스트 달력. 거기에 난젠지 산몬(三門)이 그려져 있었다. 정작 그 만화는 별로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 한 번 읽고 다시 들춰 보지 않았는데, 내용과 아무 상관도 없는 그 달력 일러스트 한 장이 이상하리만치 뇌리에 박혔다.

난젠지는 일본 왕실에서 세운 최초의 선종 사찰로, 국보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많고, 귀중한 문화재도 보관되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이나 일본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수로각(水路閣)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내 관심은 온통 산몬 하나에 집중되었다.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그저 그 일러스트에 그려진 2층짜리 건물에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산몬을 찾았다.

산몬 정면 모습

첫 만남은 붉은 홍매화가 자태를 뽐내는 2월 말,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맞이하려 대지가 꿈틀대는 어느 따스한 날이었다. 난젠지 입구에서 웅장하고도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산몬을 만났다. 마치 난젠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자신을 통과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을 것만 같다. 실제로 이 거대한 산몬은 사원을 대표하는 정문이기도 하다. 고개를 드니 산몬의 2층 누각이 보인다. 일단 올라가 봐야겠다. 바로 저곳을 가기 위해 난젠지를 찾아왔으니까.

산몬의 2층에 올라가려면 특별 관람료를 내야 한다. 관람료를 내는 작은 창구 옆에 세워진 계단. 체감 경사가 80°는 족히 될 것 같은 까마득한 계단을 거의 기어가다시피 올라갔다. 계단 한 단의 높이도 보통 높은 게 아니었다. 한 단 한 단 오를 때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정도면 지금보다 더 키가 작았을 옛날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정말 올라가기 힘든 곳이었겠구나 싶었다. 폭이 무척 좁은 일본 전통 의상을 생각하면 더더욱.

가파른 계단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기에 미끄러운 양말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세월의 흔적을 품은, 맨질맨질 윤이 나는 나무 계단은 미끄럼을 방지하는 장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미끄러질 것 같은 공포스러운 상상을 막지는 못했다. 지하에서 지상 세계로 나오는 관문 같기도 하고, 속세에서 내세로 가는 길목 같기도 한 뻥 뚫린 구멍을 통과하며 간신히 산몬의 높디높은 2층에 도달했다.

2층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테라스처럼 생긴 누각이다. 건물의 가운데엔 법당과 본존불상이 자리하고 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개방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얼마나 가파른 경사를 올라왔는지 저 멀리 교토 시내와 아라시야마(嵐山, あらしやま)가 훤히 보였다. 전망대에 올라온 듯 탁 트인 시야는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교토이기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절경, 매끄러운 마룻바닥이 전해주는 오래된 것의 느낌, 사원의 중앙부를 지키는 본존불상과 근엄한 표정의 16나한상까지. 이곳은 온몸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산몬 2층 누각, 겨울

삐그덕거리는 누각을 몇 바퀴인지도 모를 만큼 하염없이 걸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른 봄바람을 한참 느꼈다. 이 바람을 느끼러 여기로 왔나 보다. 이 한가로운 정경을 느끼러 왔나 보다. 그저 여기에 와서 걸어 보라고, 앉아 보라고 산몬이 나를 여기로 불렀나 보다.

다른 관람객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 삐그덕삐그덕 소리마저 정겹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눈을 뜨고 먼 곳을 응시했다. 초봄의 차갑지만 따스한 나무 바닥이 엉덩이와 발바닥에 기분 좋은 자극을 선사한다. 이 정도의 높이에서도 충분히 개방감을 느낄 수 있는 교토만의 정취에 한참을 취한다.

산몬 2층에서 바라 본 교토 시내와 아라시야마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쪽을 향해 살짝 기울어져 있는 나무 바닥은 재미와 함께 약간의 두려움을 선사한다. 유쾌한 공포를 발바닥 전체로 느끼며 한 바퀴를 더 돌고 난 뒤 다시 계단 앞에 섰다.

살짝 바깥쪽으로 기울어 있는 바닥

내려가는 계단은 올라올 때보다 배는 더 무서웠다. 던전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의 입구를 통과해 거의 앉아서 계단을 내려왔다. 내려갈 때 미끄러지면 그야말로 최소 사망이다.

까마득한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관문 같은 계단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을 때는 안도와 함께 아쉬움이 밀려왔다. 더 있다가 내려올걸. 왜 이렇게 아쉬울까? 뭐 한 거 하나 없는데. 뭐 볼 거 하나 없는데. 그럼에도 산몬은 헤어지기 아쉬운 곳이었다. 신발을 다시 신으면서 사계절의 산몬을 모두 올라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을 실행한 건 태양이 천하를 녹여버릴 기세로 이글거리는 한여름이었다. 주변이 녹음으로 뒤덮인 산몬은 겨울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반겨 주었다. 여전한 위세, 여전한 경사. 뜨거운 햇살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원함마저 느껴지던 나무 바닥.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느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식혀 주던 바람. 건물의 오래된 나무 냄새와 주위의 녹음에서 전해져 오는 신선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코를 간질였다. 더위에 지친 나를 쉬게 해주는 편안함이 여전히 산몬에 있었다.

2층 누각, 여름. 오른쪽 끝으로 난젠지의 명물 수로각이 살짝 보인다.

이번엔 맨발로 나무의 감촉을 느꼈다. 바닥에 풀썩 앉아 짧은 하의 밑에 드러난 종아리로 나무의 시원함을 느꼈다.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는 산몬을 느꼈다. 다른 계절에 만난 산몬은 두 번째 만남임에도 새로웠다. 이 색다른 느낌은 또 다른 계절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산몬은 나에게 교토에 다시 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교토의 그 많고 많은 절과 신사들을 중 그 어떤 곳보다도 강하게 나와 교토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산몬의 풍경을 담은 그 일러스트가 왜 유독 내 눈에 띄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심지어 지금은 그 만화의 내용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림 속 배경으로 그려진 산몬이 난젠지로 나를 초대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다음 만남은 꽃과 함께일까, 단풍과 함께일까? 언제든 나는 적어도 두 번은 더 산몬을 만나러 갈 것이다. 적어도 두 번. 그러나 실제로 몇 번이 될지는 나도, 산몬도 모른다.

뜨거운 여름날의 산몬

글·사진 박소현

15년차 일본 만화 번역가. 17년차 일본 여행 초보자. 27년차 기혼자. 일본어를 읽는 데 지치면 일본어를 말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게 삶의 낙인 고양이 집사. 그저 설렁설렁 일본을 산책하는 게 좋다.
『걸스 인 도쿄』 『도서 번역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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