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상속자인가, 파괴자인가

김용출 2022. 7. 9.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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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3만3000여통 분석 바탕 생애 조명
전장 53곳 찾아 전략·전술 생생하게 복원
'가장 위대한 지휘관'으로 인정받았지만
수십만 젊은이 죽음 내몬 '전쟁광' 평가도
19세기 세계사 운명 결정지은 것은 사실
신세계그룹 인문학 중흥사업 일환 출간
19세기 세계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나폴레옹의 편지 3만여통을 분석하고 그가 누빈 전장 53곳을 답사해 전모를 생생하게 복원한 나폴레옹 전기가 번역 출간됐다. 무려 1300페이지가 넘는다. 사진은 나폴레옹의 초상. 출판사 제공
나폴레옹/앤드루 로버츠/한은경 조행복 옮김/김영사/4만9000원

“… 파리 수비대 소속 군악대가 이미 거리를 행군했고, 그 뒤로 많은 사람과 군인이 따라다녔다. 밤에는 사방에서 조명을 빠르게 밝혔으며, 극장마다 ‘공화국 만세! 보나파르트 만세!’ 라는 구호로 귀환 소식을 알렸다. 단순히 여느 장군의 귀환이 아니라 장군의 제복을 걸친 지도자의 귀환이었다.”

1799년 10월, 정부의 정식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이집트 원정 도중 파리로 돌아온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파리 시민 지지를 받으면서 사람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하루 평균 15통의 편지를 쓴 나폴레옹은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딱 두 통의 편지를 쓰면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음모를 꾸몄다.

11월10일, 나폴레옹은 장교와 국가경호대, 용기병 부대 등을 동원해 자신을 향해 “독재자를 타도하라” “무법자!”라고 외치며 저항하는 오백인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였다. 그는 세 명의 집정을 두는 헌법을 만들고 이듬해 1월 통과시킨 뒤 초대 제1집정이 됐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였다. 4년 뒤인 1804년에는 대관식을 갖고 스스로 프랑스공화국 황제를 선포했다.

1769년 지중해 중부의 코르시카섬에서 하급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나폴레옹은 아홉살 무렵 형과 함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프랑스로 건너갔다. 젊은 시절 소설가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브리엔 군사학교를 거쳐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조기에 졸업하고 1785년 포병 장교로 임관했다.
앤드루 로버츠/한은경 조행복 옮김/김영사/4만9000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고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유럽의 군주들은 프랑스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내부 왕당파들과 연합해 1793년 프랑스 툴롱항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이때 격렬한 포격전 끝에 왕당파를 제압하고 툴롱항을 장악함으로써 무훈을 세우고 24세의 나이에 장군이 됐다.

나폴레옹은 이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돼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큰 명성을 쌓았고, 다시 사령관으로 이집트 원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집트 원정 도중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에 참패하고 육군 역시 대불동맹군에 연패하자 국내로 돌아와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15년 동안 권좌를 지켰다. 그는 계속된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국내에선 법 앞의 평등, 능력주의, 재산권과 종교적 관용, 합리적인 정부 등 프랑스혁명 이념을 법률로써 공고하게 했다. 대외적으론 왕정복고를 획책하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 등을 격파하고 유럽 대륙을 복속시켰다.

그가 짧은 기간에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뛰어난 군사 지휘관을 넘어 군사 전략과 전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군사적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간과되던 포병대의 가치를 알아보고 전술 운용의 핵심으로 뒀고, 군단 체제를 고안했다. 특히 신속한 기동전을 무엇보다 중시했고, 수세에 몰리기보다 선제적으로 대담한 공세를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신속, 신속, 신속, 속도!”를 외쳤다. “전투 중에는 아주 사소한 기동이 결정적으로 우위를 안겨줄 때가 많다. 물 한 방울 때문에 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지휘한 60회의 전투 가운데 오직 다섯 번만 수세에 몰렸고 나머지는 모두 공세적으로 싸웠다. 그리하여 무려 53회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단 7회만 패배했을 뿐이다. 아크레, 아스펀-에슬링, 라이프치히, 라로티에르, 랑, 아르시, 워털루 전투.

대륙봉쇄령으로 실패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한 나폴레옹은 1812년 단행한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며 몰락했다. 그는 러시아가 모스크바를 불태울 정도로 초토화 작전을 쓰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발진티푸스로 많은 병사를 잃었다. 이듬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군에 패하고 1814년에는 파리마저 함락되자, 그는 엘바섬에 유배됐다. 1815년 엘바섬을 탈출해 권력을 장악했던 그는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연합군에 다시 패한 뒤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됐다가 1821년 숨졌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나폴레옹연구소 특별회원 앤드루 로버츠는 프랑스는 물론 영국과 미국 등 15개국의 기록보관소 69곳에서 찾아낸 나폴레옹 편지 3만3000여 통을 분석해 그의 생애를 엄밀하게 조명했다. 아울러 나폴레옹이 전투를 벌인 전장 60곳 가운데 53곳을 답사하며 그의 전략과 전술, 대응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무려 1300페이지가 넘는 나폴레옹 전기는 지금까지 발간된 1000권 이상의 나폴레옹 전기 가운데 단연 최고라는 평가다. 이번에 신세계의 인문학 중흥사업 ‘지식향연’의 일환으로 번역 출간됐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상속자’라는 찬사도, ‘프랑스혁명의 파괴자’라는 비난도 모두 받았다. 군대 장교 출신인 탓에 결과의 평등이나 의회주의,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망가뜨린 것은 분명했다. 아울러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으로 인정받기도 하지만, 전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고 수십만의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몬 ‘전쟁광’이라는 혹독한 평가도 공존한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이 19세기 근대 유럽을 뒤흔들고 세계사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사실 만큼은 변할 수 없다. 그를 몰락시킨 유럽의 지도자들은 나폴레옹 이전 상태로 유럽을 되돌리고자 했지만 그가 전파한 혁명 정신을 되돌릴 순 없었다. 법 앞의 평등과 법치주의, 능력주의는 전 유럽에 전파됐고, 나폴레옹 법전은 40여개 국가의 법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결국 나폴레옹이 자만심과 오만함에 취해 응당 받아야 할 천벌을 받았다며 ‘나폴레옹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많은 전기 작가들의 견해는 틀렸다고 지적한다. “나폴레옹을 몰락으로 이끈 것은 그의 마음속 깊이 내재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일련의 사건과 몇 가지 중대한 실수가 결합한 결과다.”(48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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