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혜경 첫 소설집 [그집앞]
(서울=연합) 세상살이에 치인 사람들의 상처받은 내면을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온 이혜경씨(39)가 첫 소설집 「그 집 앞」(민음사刊)을 상재했다.
82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중편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나 10여년 침묵하다가 95년 장편 「길 위의 집」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재개한 이 작가는 9편의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에서 오래 묵은 술과 같이 깊은 맛이 느껴지는 문체와 세상읽기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에는 극적인 사건도 화려한 주인공도 없다. 소설들의 화자는 하나같이 주변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시장에서 닭을 팔며 오빠에게 돈을 대는 노처녀(그늘바람꽃), 소실의 딸로 역시 소실 딸인 시어머니의 냉대에 시달리는 가정주부(그집앞),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는 이혼녀(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의류회사 상무에서 명예퇴직한 뒤 미8군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중년 남자(젖은 골짜기), 혼자된 딸집에서 치매 사돈을 돌보며 사는 여성(어스름녘) 등.
이들의 신산하고 남루한 삶, 삶의 고통을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면서 작가는 그래도 삶은 살아볼만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듯 하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그 집 앞>의 주인공 화자의 말 속에 작가의 그런 뜻이 담겨 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살아내리라. 나는 절망적으로 다짐한다. 은빛 캔의 유혹을 일거에 떨칠 자신도, 시어머니 앞에서 자꾸 닫히려는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일 자신도 없지만, 내 안의 흙탕물을 가만가만 가라앉힐 수는 있을 것이다. 강물이 더 혼탁해지기 전에, 흐려진 제 몸을 스스로 씻어내려 목숨들을 품어 안는 강물의 사랑으로."
문학평론가 우찬제씨는 <고독한 공생(共生)>이라는 제목의 해설에서 "이혜경은 마음의 무늬를 말로 어루더듬어 충분히 전할 줄 아는 드문 작가"라면서 "가슴에 스며든 상처 때문에 이혜경소설의 인물들은 얼핏 보기에 고독한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나 고독의 심연, 고립의 늪에서 이들은 더불어 사는 공생의 가치를 발견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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