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1992. 6. 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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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연합(聯合)) 金興植특파원= 다음은 코로트코프 박사가 비밀문건을 중심으로 金日成의 항일빨치산투쟁, 집권과정 및 한국전쟁에 관해 밝힌 내용의 요약이다.

◇항일빨치산투쟁: 金日成이 붉은 군대에 정식 입대한 것은 1942년 7월17일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45년 8월30일 그가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훈장증서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 金이 훈장을 받게 된 공적사항으로는 항일빨치산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金이 소련군 대위로 진급시 승진상신서에는 "진지첸을 만주에서 빨치산대장으로 활동하도록 파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는 金日成이 북한당국의 공식 선전에서 처럼 스스로 빨치산부대를 편성, 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극동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金日成은 이보다 훨씬 앞서 32년에 동만주에서 중국인 양정우가 지휘하는 빨치산부대에 참가, 사병으로 출발해서 소대장까지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어디까지나 소련군의 지휘하에서 수행됐다.

특히 金日成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 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 대장 앞으로 제출된 金의 인물평가서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 현재 대대장 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金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소련군 통역관은 후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나에게 말했다. 金에게는 질문에 답변만 하도록 허락되었는데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金-"진지첸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로 시작됐다.)

--귀관은 한국인인가?

▲ 그렇다.

--남평양에서 태어났는가?

▲그렇다.

--공산당원인가?

▲그렇다.

--가족은?

▲결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다.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은가?

▲그렇다.

--그렇다면 북한에 가서 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계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가겠다.

(여기서 소련장군들은 "좋아. 대답 잘했어"라고 칭찬)

두 장군은 이어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金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 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 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金日成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로 張時雨, 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 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 金日成 등 만주그룹, 그리고 조만식 선생 등 非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의 공산활동가들은 어미없는 새끼고양이에 불과해 적이 처들어오면 흩어질 수 밖에 없다. 한반도 해방은 이를테면 아버지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버지(지도자)가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위의 인물들이 군대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특히 "현재 그들에게 군사업무를 가르치기에는 시간이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실하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해야 한다"고 소련 극동군사령부에 지시,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金日成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하여 지도자로 선택을 받은 金은 45년 10월2일 부터 진지첸이란 이름을 버렸으며 8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소련함정 푸가초프號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金日成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스티코프는 크루지코프에게 "내일은 아주 고귀한 한국인이 도착할 것이다. 그의 신변안전과 숙박은 물론 평양까지 호위하는데 만전을 기하라"고 명령했다. 크루지코프가 맞은 사람은(군복이 아니라) 쥐색양복을 똑같이 입은 일단의 한국인들이었는데 맨 먼저 나온 사람이 "내가 김일성이오"라고 인사했다. 크루지코프는 10월14일 열린 평양군중대회에서 金日成이 연설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자신이 조선의 최고지도자를 만난 것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한국전쟁 관련: 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스크바와 평양은 <해방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金日成이 6월25일 단추를 눌렀을 뿐이다. 이번에 확인된 비밀문건 가운데는 당시 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당일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전문이 있다. 이 전문에는 "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 평양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이며 사람들은 누구도 전쟁개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씌여 있다. 또 국방부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문건에는 <작전계획 초안>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6월25일, 00탱크연대는 00도시로 향한다. 00보병사단은 00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식으로 연대급 이상 부대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으며 이밖에 <서울점령초안>도 포함돼 있다.

전쟁이 초기 승리에서 미군(美軍)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金日成은 크게 당황했다. 당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전문에는 "金日成이 쇼크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군대지휘와 국가지도는 엉망이 되고 있다. 金은 지하사령부에서 본인에게 '나는 실패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또다시 빨치산투쟁을 하는 것 외는 다른 길이 없을것 같다. (미군(美軍)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 상황이 긴박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부탁해 나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돼 있다. 당시 스티코프는 스탈린으로 부터 거의 참모부 보다 더 신뢰를 받는 인물로 그의 전문은 항상 스탈린에게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에 전쟁상황과 金에 대한 평가는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은 10월 전쟁이 실패했음을 느끼자 수습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초기에는 매우 빈번히 金과 전문을 주고 받았으나 이때 부터는 金에게 아무런 답신도 보내주지 않음으로써 실망감을 표시했다.

당시 스탈린 측근으로 총참모부 작전부장이었던 스테멘코 장군은 후일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金은 아주 무능한 장군이다. 그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인물이 없으니 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본인이 말리노프스키 원수(극동군총사령관) 휘하에서 한국전 정보담당 장교로 재직시 그는 金日成을 한번도 이름으로 호칭하는 법이 없이 오직 <모자를 쓴 대위>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 군대지식도 적고 전쟁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이같은 평가들을 놓고 볼 때 金은 전쟁에서 그다지 훌륭한 지휘를 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한국과 관련된 소련군: 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진주 부터 53년 종전까지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군인은 모두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 훈장을 받았거나 전사자, 부상자 및 유가족들은 2차대전 심지어는 최근의 아프간전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소련당국(지금은 러시아정부)이 한국전 개입사실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 역시 한국전쟁과 관련해 적성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훈장증서에는 이상하게도 "조선전쟁에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으므로 이 훈장을 수여함"으로만 돼 있고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전혀 없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더구나 어느 전쟁의 경우에나 받는 전쟁참가 증명서도 발급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훈장수여자들이 당연히 받게 돼 있는 면세, 보다 많은 연금, 무료여행, 특별상점이용 등 특전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소련의 한국전 참전내용이 점차 공개되면서 국방부와 군사(軍史)연구소로 왜 아직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가 하는 문의전화가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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