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 해명할 유물, 60년만에 첫 공개

1990. 3. 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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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박물관- 특별전및 공개강연회 가져 고구려문화 계승자로서의 발해문화 재조명

(서울=연합(聯合)) 수수께끼 속의 발해(渤海)史를 해명할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발해(渤海) 遺物들 이 60년만에 처음 공개된다.

서울대학교박물관(관장: 任孝宰)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발굴·수집하여 소장해온 발해(渤海) 遺物 2백여점을 12일부터 31일까지 특별전을 통해 최초로 전시하는 한편 <발해(渤海)의 역사(歷史)와 문화(文化)>를 재조명하는 공개강연회를 12일 서울대학 캠퍼스에서 개최한다.

서기 6백98년부터 9백26년까지 한반도북부와 요하 동쪽에서 흑룡강 이남 대부분의 만주지역에 걸쳐 있었던 대제국인 발해(渤海)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는 워낙 이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데다 중국, 소련, 한국 등 지리적으로 소속국가간의 갈등 등 여러가지 제약조건으로 어려움이 많아왔다.

중국의 경우 발해(渤海)의 문화에서 고구려문화 요소를 거의 무시한채 당문화와 말갈문화 요소만 강조하고 있고 소련은 발해를 말갈국가로 보면서도 그것을 중국사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극동의 소수민족국가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으며 북한은 외래적인 요소나 토착적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한채 고구려문화 요소만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그동안 발해연구가 드물었는데 근래들어 한국사에서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아 발해와 신라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하고 고구려와 발해문화와의 관련성을 강조하면서 발해사에 대한 재조명작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학박물관의 이번 <발해유물특별전>은 국내의 본격적 발해사연구를 위한 신호탄이 되고 있는데 전시되는 유물은 발해 동경성(東京城)(黑龍江省寧安縣)과 半拉城(길림성(吉林省)훈춘현), 西古城(길림성(吉林省)화룡현) 등 10여 곳의 발해 고토(古土) 성지 유적에서 출토된 여러가지 기와편, 불상, 장식벽돌, 벽화편, 토기편 등이다. 이와 함께 광개토왕비문 탁본 2종도 전시되고 있다.

전시 유물중에서도 특히 녹유(綠釉)치미, 녹유(綠釉)기둥밑장식, 소조불상, 문자기와 등은 발해 건축및 불교미술과 문화전반에 걸쳐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유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대박물관이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발해유물을 소장하게 된 것은 경성제국대학 시절인 1932년 부속도서관상의회 위원장은로 부임한 일본인교수 鳥山喜一이 20년대부터 40년대에 걸쳐 동경성(東京城) 등에서 발해유물발굴에 직접 참여, 유물들을 수집해온데서 비롯된다.

발해유물 대부분이 파편으로 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현재 발해 유적은 우리가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실정인만큼 발해문화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이것은 매우 귀중한 고증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즉 이번 전시된 유물들을 통해 발해는 고구려문화를 직접 계승했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아 당나라의 영향 등 국제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祿釉의 사용이나 와당 등의 건축미술과 벽화, 불상 등에서 보이는 문화의 특징에서는 고구려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교수는 12일의 <발해 역사와 문화> 공개강연회 발표논문 <발해문화의 성격>에서 "발해의 사회구성을 보면 고구려유민들이 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말갈족이 피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서인 <類聚國史>에서도 증명되고 있다"고 전제하고 "발해문화는 고구려문화를 위시해 당문화, 토착적 말갈문화, 중앙아시아 지역이나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문화 뿐 아니라 발해가 건국된 뒤에 스스로 창조한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해문화의 복합성은 貞惠公主(737-777)무덤과 貞孝公主(756-792)무덤에서 찾아 볼 수있는데 정효공주무덤의 경우 구조나 벽화양식이 중국적이면서 순장을 행한 것이라든가 5월장을 치른 것 등은 부여적인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기에 塔葬은 불교적 양식, 묘비의 내용은 유교적인 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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