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루 베이스를 몇 걸음 앞에 두고, 박정우는 부상을 직감했다.
“속도를 줄여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공이 오지 않았다”라는 생각에 기습 번트를 시도했던 박정우는 질주를 멈출 수 없었다.
박정우는 1루 베이스를 밟은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 주저앉았다.
간발의 차이로 아웃이 된 박정우는 이후 부축을 받은 채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햄스트링 손상이었다.

박정우는 지난해 상상하지 못했던 야구 인생 최고의 시간들을 보냈다.
시작은 좋지 못했다.
퓨처스리그 ‘도루왕’이라는 명성과 달리 박정우는 발로 최악의 순간을 경험했다.
‘끝내기 주루사’를 기록하면서 박정우는 사직 그라운드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2024시즌 KIA의 마지막 득점이 박정우의 발에서 기록됐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5차전, 6-5로 앞선 8회말 1사 1루에서 이창진의 대주자로 투입된 박정우는 박찬호의 좌중간 2루타 때 홈을 밟았다.
그리고 이 경기가 7-5로 마무리되면서 KIA는 ‘통합 우승’을 이뤘다.
결국 이 득점은 2024시즌 기록된 KBO의 마지막 득점이었다. 그렇게 박정우는 2024시즌 마침표를 찍었다.
프로 입단 후 처음 ‘가을잔치’도 경험하고, 한국시리즈라는 큰 무대에 서서 팀의 12번째 우승 순간을 함께 했던 시즌.
우승의 여운을 안고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캠프에서 구슬땀을 흘렸던 박정우는 2025시즌에는 처음으로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개막전을 앞두고 박정우는 걱정을 했다. 다른 걱정이 아니라 개막식 행사가 처음이다 보니 자신의 이름이 불릴 순간을 걱정한 것이다.
“그라운드로 나가다가 긴장해서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요”가 9년 차 박정우의 고민이었다.
행복한 고민 속 개막을 맞은 그는 이내 또 다른 놀라운 경험을 했다.
박정우 이름으로 챔피언스필드에 커피차가 등장한 것이다.
처음 커피차 선물을 받은 박정우는 동료들과 관계자들에게 커피차를 대접하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웃으면서도 박정우는 어색하다며 수줍어했다.
“내 삶이 아닌 느낌”이라는 게 박정우의 이야기였다.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간절하게 기다리면서도, 막상 기회가 오면 긴장감에 준비했던 것들을 보여주지 못하고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던 시간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꾸준하게 1군에서 뛰면서 한국시리즈도 경험하고 개막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리고 스타 선수들이나 받는 것으로 알았던 커피차 선물을 마주했으니. 박정우에게는 달라진 삶이 어색하고 신기했다.

낯선 행복 속에 시작한 시즌, 자신은 있었다.
“억울해서라도 안타를 쳐야 할 것 같다. 내 유니폼 입은 팬들이 부끄럽지 않게 뛰겠다”며 박정우는 마무리캠프에서 방망이를 돌리고 또 돌렸다. 스프링캠프에서도 야간, 엑스트라 훈련도 열심히 했다.
노력의 결과로 더 자신 있게 그라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외야에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박정우에게는 더 열심히 잘 해야 한다는 동기 부여도 있었다. 또 그만큼 기회도 생겼다.
지난해 경험과 노력 그리고 책임감이 더해지면서 ‘박정우의 야구’가 눈을 뜨려던 시점에서 박정우가 주저앉았다 .
앞서 몇 차례 위기는 있었다.
도루를 하다가 어깨를 다치면서 잠시 숨을 골라야 했고, 옆구리 통증으로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공을 잡기 위해 몸을 날리고, 펜스에 부딪히면서 찾아온 부상.
다행히 박정우는 자리를 지켰다.
박정우는 “맞아서라도 나가고, 몸을 날려서라도 공을 잡겠다”고 말했었다.
자신은 몸으로라도 역할을 해야 하는 선수라는 게 박정우의 이야기였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니까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코치님들이 한꺼번에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나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 계속 잘해야 된다. 다른 선수들보다 더 쳐야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받을 수 있으니까 죽을 것같이 하고 있다.”
오랜 시간 기다려왔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던 박정우에게는 ‘다음’은 없었다.
그래서 공에 맞을 생각을 하고 다칠 각오를 하고 경기를 뛰었다.
무모하다고 해도 박정우에게는 그게 생존법이었다.
“나는 100%로 해야 한다. 그런 입장이다. 조심하면서 할 바에는 100%로 하면서 다치는 게 낫다. 100%로 안 하면 후회한다.”
열심히 달렸던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기회를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은 있다.
박정우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나만큼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걸 잡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겠나.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간절하게 준비하면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무조건 달리고 봤던 박정우지만, 또 기회가 생기면 100%로 달릴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질주를 준비할 생각이다.
부상 이후 박정우는 자신을 아끼는 이들의 애정어린 쓴소리를 들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박정우를 지켜보고 이끌어왔던 박찬호는 “안 아파야 뭐라도 하는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붙어있어야 한다”며 “혼자 뛰다가 이렇게 다치면 안 된다. 우리는 뛰면서 누벼야 하는 선수다. 선수들이 괜히 경기를 많이 뛰면서도 안 다치는 것이 아니다. 처음이 없는 선수는 없다. 처음 이렇게 뛰는 시즌이라서 다쳤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습관부터 중요하다. 항상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수분 보충을 계속해 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박정우는 KBO리그를 정복하고 MLB에서 활약하고 있는 친구 이정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서도 “야구만 하는 게 아니다”라는 잔소리도 들었다.
이정후의 이야기도 박찬호와 같다.
준비한 것들이 아까워서라도, 뭐라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런 부상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우는 “청소년 대표팀을 하면서 정후랑 친해졌다. 나랑 잘 맞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인데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까 좋다. 정후가 내 기사를 찾아본다. 앞으로는 좋은 기사로 연락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한 경기, 한 타석이 간절한 만큼 100%로 달릴 수밖에 없지만 일단 버텨야 기회가 온다. 그리고 선수는 그라운드에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완벽한 100%를 위해서는 거침없는 질주와 함께 세밀한 준비와 노력도 필요하다.
‘자 달릴까? 타이거즈 박정우’
박정우의 응원가 가사다. ‘달릴까?’라는 질문을 ‘달리자’라는 확신으로 바꿀 수 있을까.
간절한 박정우가 위기와 성장, 기로에 섰다.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