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이솝 우화 (28)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배가 부풀어 오른 여우

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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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이 들판으로 양을 치러 나갈 때는 점심때 먹을 음식들을 챙겨 갑니다. 그런데 아무 데나 놓아두거나 잘못 보관하면 어떤 짐승이 몰래 훔쳐 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목자마다 자신이 즐겨 이용하는 은신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무 안에 눈에 잘 띄지 않는 큰 구멍이 나 있다면 음식을 숨겨두기에 안성맞춤이겠죠. 어느 날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들판으로 나가면서 커다란 참나무에 난 구멍 안에 빵과 고기를 숨겨두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죠.

하지만 여우 한 마리가 몰래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마침 여우는 며칠 굶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배도 홀쭉해져 있었죠.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사라지자 여우는 재빨리 참나무 구멍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끈따끈한 빵과 고기가 잔뜩 있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허겁지겁 모두 먹어 치웠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운수대통한 날이 또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배가 부르자 기분이 좋고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습니다. 배가 불러 뚱뚱해진 탓에 참나무 구멍에서 나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목자들이 오기 전에 빨리 달아나야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목자들이 자신을 발견하면 빵과 고기를 다 먹어 치운 걸 알고 화가 나서 두들겨 팰 게 분명했습니다. 점심 식사로 여우 고기 바비큐를 해 먹을지도 모르지요.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점점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습니다.

‘내가 이대로 죽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먹잇감을 좀 더 찾아보는 건데…….’

‘그동안 내가 너무 약삭빠르게 살아왔던 것 같아. 착하게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목자들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어떨까? 그것도 나쁘지 않아.’

여우는 이런 생각을 하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다른 여우가 이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참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구멍 안에서 웬 여우가 울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슬피 우는 거요? 그리고 참나무 구멍 안에는 왜 들어가 있소?”

배가 부풀어 오른 여우는 지나가는 여우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나가는 여우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참나무 안에 있는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울 필요 없소. 아까 참나무 구멍 안으로 들어갈 때처럼 배가 꺼지기를 기다리면 되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란 이야기지. 배가 홀쭉해지면 구멍에서 쉽게 나올 수가 있을 거요.”

조언을 마친 여우는 다시 제 갈 길을 갔습니다.

참나무 안에 갇힌 배부른 여우는 울음을 멈추고 배가 빨리 꺼지도록 뜀뛰기를 했습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던 얼굴에는 어느덧 근심이 사라진 채 옅은 미소만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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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럭저럭 견디거나 눈 딱 감고 참을 수 있으면 다행인데, 어디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고, 희망의 불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생각되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환란의 거센 파도가 나를 마구 집어삼키고 있다고 여겨질 때 그만 죽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아니,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는 수십,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정말 죽을 정도로 힘들어요.”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런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놔버리면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입니다. 연령표준화자살률(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에서 압도적인 1위입니다. 연령대를 살펴보면 10대부터 30대까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젊은이들의 자살이 왜 이렇게 늘어나는 걸까요? 10대는 입시 스트레스와 가정불화, 20대는 취업난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30대는 이혼 등 가정 문제와 사회적 부적응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 정말 심각한 국가적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면 유명인들이나 고위직 인사들의 자살이 심심치 않게 보도됩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돈과 명성을 다 거머쥔 듯한 유명인들이 개인사나 가정불화 등을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비리나 범죄에 연루되어 검찰이나 경찰의 조사를 받던 고위직 인사들이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고 착잡하게 만듭니다. 자칫 나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게 다 덮어지고 없었던 게 되며 깨끗하게 마무리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가 있습니다. 각종 매체를 통해 반복 재생산되는 이런 자살 관련 소식은 너무 가볍고 선정적이어서 사람들이 점점 자살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살은 전염성이 꽤 높습니다. 특히 저명한 사람이 자살하면 같은 방법으로 자살하거나 자살하려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이를 ‘베르테르 효과’라고 합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1774년에 펴낸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연인 로테에게 실연당한 뒤 권총으로 자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후 소설 주인공을 모방한 자살이 전 유럽으로 확산하여 권총 자살이 늘어났습니다. 당시 괴테는 독자들에게 소설과 현실은 다르므로 제발 베르테르를 따라 하지 말라고 호소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에 주목한 미국의 사회학자 필립스가 1974년 이와 같은 모방 자살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자살의 원인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우울장애(Depressive Disorder)입니다. 우울 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 자살에 관한 생각이 건강한 사람에 비해 급격히 증가합니다. 여기에 스트레스나 음주 등이 겹치면 위험도는 더 올라갑니다. 연구에 따르면, 자살한 사람을 상대로 심리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을 하면 75%가 우울장애라고 합니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우울장애를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자살 재시도 비율을 80% 가까이 줄일 수 있습니다. 자살과 우울장애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죠. 평상시라면 내 선택지에 없어야 할 자살이 내 선택지로 들어왔다는 건,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에 절망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병적 상태, 즉 우울장애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자살 충동은 나의 나약함이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내 모든 생각이 그 선택지만을 향하도록 하는 우울장애가 본질일 수 있습니다.


옛날 페르시아의 한 임금이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찾아오너라.”

신하들은 모여서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밤새 의논한 신하들은 이튿날 임금에게 반지 하나를 만들어 바쳤습니다. 임금은 반지에 새겨진 글귀를 읽고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

“This, too, shall pass away(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반지에 새겨진 글귀는 임금의 마음에 딱 맞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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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왕은 지략과 용맹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세출의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수많은 전쟁과 권력 암투를 겪으며 줄곧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는 반지 세공사를 불러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를 위해 반지를 하나 만들어다오. 거기에는 내가 전쟁에서 승리해 환호할 때도 교만에 빠지지 않고, 내가 전쟁에서 패배해 낙심할 때도 좌절하지 않도록 감정을 조절해주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글귀라야 한다.”

반지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새겨 넣을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며칠 동안 번뇌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왕자인 솔로몬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솔로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불릴 만큼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였습니다.

솔로몬 왕자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알려주었습니다.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글귀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워낙 많은 설이 있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는 랜터 윌슨 스미스의 시를 통해 내용을 확인하고, 위로를 받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인생 앞에 겸허해질 뿐입니다.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이

네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난 랜터 윌슨 스미스는 시인이자 찬송가 작사가로 활약하다가 193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백여 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 시는 여전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습니다. 이 시가 가진 힘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로부터 도출된 공감과 위로입니다. 그리고 이 시의 메시지는 삶 앞에서의 지극한 겸허함입니다.


우화에서 여우는 하루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갔습니다. 참나무에 난 구멍 안으로 들어가 목자들이 숨겨놓은 빵과 고기를 실컷 먹을 때는 천국에 온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 뚱뚱해진 탓에 참나무 구멍에서 나올 수 없을 때는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겠죠. 시간이 갈수록 여우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살길이 없었습니다. 목자들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이때 지나가는 여우가 생명의 빛줄기를 던져주었습니다. 배가 꺼지기를 기다렸다가 배가 홀쭉해졌을 때 구멍에서 나오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란 말이죠. 이것 또한 지나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그 시간은 지나갑니다. 인생이란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겁니다. 환희와 기쁨, 명예와 영광이 온통 내 것 같아도 그 시간 역시 지나갑니다. 인생에서 영원한 건 없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가 있고, 쥘 때가 있으면 펼 때가 있습니다.

자살은 끝이 아닙니다. 궁극의 해결책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나아가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자살은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대응 방안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더 괴롭고 힘든 결과를 남기는 가장 무책임한 극단적 선택일 뿐입니다. 책임지는 건 살아서 끝을 보는 겁니다. 살아 있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은 이 한마디입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발칙한 이솝 우화’는 이번 글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재되었던 글은 곧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될 예정입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