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은 변했는가? 육사 카르텔의 민낯... 그리고 참군인!

[최용주 (전)5.18진상규명조사위 조사1과장]

5.18광주의 군인들과 달랐던 12.3군인들

12.3비상계엄 당시 가장 의아한 장면은 국회로 출동한 군인들의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1980년 5월에 광주를 점령한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고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한 나에게는 더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었다.

사실 이 장면은 외견상 "계엄이 경고성이었다"는 윤석열의 주장을 지지하는 현장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국회를 점령하고 의원들을 끌어낼 실질적인 의도가 있었다면, 총기로 무장한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가 맨몸으로 맞서는 국회 직원과 시민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로 진입한 군인 중 누군가가 휴대한 자동소총이나 권총으로 공포탄 한 발만 발사했더라도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광주항쟁을 떠올려 보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1980년 5월 18일 아침 9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으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몰려왔지만, 당시 정문을 지키던 제7공수여단 33대대 병력은 고작 30명이었다. 이 30명의 병력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수백 명의 대학생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그들은 M16소총, 진압봉, 대검, 최루탄 발사기 등의 화기를 휴대하였으며, 폭동진압과 대테러 훈련으로 단련된 엘리트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5월 20일 밤과 5월 21일 오전, 광주역, 전남대학교, 도심 등으로 진출한 군인들은 발포를 해서라도 시위 확산을 막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김 없이 이행했다. 광주항쟁 당시에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135명에 달하고 총격에 의한 부상자는 320명이 넘었다. 다수의 사망자가 시위와 무관한 상태에서 희생되었으며, 이 중에는 14살 이하 미성년자 9명, 12명의 여성이 포함되어 있다. 최소 80명이 넘는 부상자가 그후 10년 안에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44년이 지난 2024년의 민주국가에서는 이런 참극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나온 여러 증언과 자료 보도 등을 종합하면 아니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12.3 계엄령이 공포된 후 얼마되지 않아 국회의사당에 잔디밭에 도착한 헬기에서 내리고 있는 계엄군들. 사진=국회CCTV/연합뉴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 상징적 사건

12.3계엄 당시 군인들의 소극적인 대응은 1980년 광주에서 그 잔인함을 유감없이 보여준 가장 강력한 국가폭력 기구인 '군' 내부에 여러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무엇보다 먼저 현장에 출동했거나 작전 실행에 책임이 있는 상당수의 영관급 장교가 상부의 부당한 명령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실행을 주저했다.

수도방위사령부의 제1경비단장(대령)은 주어진 임무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병력의 추가 투입을 거부했으며, 국회로 출동한 제1특수전사령부의 대대장(중령)은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자기 판단으로 실행하지 않았다. 수도방위사령부 작전처장(대령)은 계엄군을 수송하는 헬기의 서울 진입을 일부러 늦춰서 계엄군의 국회 출동을 최소 40분 지연시켰다.

이 의도적 항명은 시민들이 국회로 결집하고 국회가 자경(自警)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여 국회가 계엄 해제 의결을 할 수 있도록 크게 기여를 했다. 이제까지의 진술에 의하면 상급 지휘부에 속하는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소장)도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시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현장에 출동한 부사관급 이하 군인들은 1979년의 12.12사태와 1980년의 광주 학살, 그리고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 사건 등을 복합적으로 떠올렸다. 이것은 작전을 실행하는 젊은 군인들이 부여된 임무의 부당성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명령 거부에 따른 개인적 피해도 동시에 우려했음을 보여준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이 속한 조직이 초래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파국과 군의 정치적 중립의 중요성을 상당 수준 학습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위계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임무의 한계와 책임 소재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현장 군인들의 이런 정치적, 윤리적, 직업적 성찰은 자신들이 보유한 파괴적인 폭력을 민간인에게 함부로 행사할 수 없도록 자제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

불행하게도 1980년 5월 광주를 점령한 군인들은 당연히 이런 성찰을 갖추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의 조기 종식은 1980년 광주의 비극이 남긴 소중한 유산이면서, 한국사회가 지난 30년에 걸쳐 다져온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잘 보여준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기념강연에서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이번 사태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 상징적인 사건이다. 헌법재판소의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 파면 결정문이 적시한 것처럼, 오래전에 죽은 자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과 함께 “군경의 소극적 임무 수행”을 끌어내서 불법적 비상계엄을 종식시켰다.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한 후 시민들은 제2의 계엄사태를 막기위해 국회의사당 주변을 에워쌓다. 사진= 연합뉴스

44년 흐른 지금, 군은 변했는가?

그렇다면 군은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수준만큼 변했는가? 나는 아직 회의적이다. 아쉽게도 이번에 우리 군인들이 보여준 여러 긍정적인 모습은 군의 내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폭력기구로서 군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외부 환경 변화의 반영물이다.

이번에 부당한 상부명령에 불응한 영관급 장교들은 전부 비(非)육사 출신으로 이른바 군부(軍部)를 이끄는 핵심 세력이라고 볼 수 없으며, 젊은 군인들이 보여준 군의 역할에 대한 발전된 인식의 재료는 군대가 아니라 그들이 자라고 교육받은 가정과 사회와 학교와 문화적 환경이 제공한 것이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 군대 그 어디에서도 군의 정치적 중립과 군의 폭력에 의한 비극적 사태와 관련된 정훈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지 않는다. 12.3비상계엄 사태가 남긴 가장 큰 우려 중 하나는 비상계엄이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내부 폭로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적 목적의 비상계엄은 그 정당성을 위장하기 위해 정보, 병참, 수송, 수사, 홍보와 선전 등에 걸쳐 광범위한 군사적 후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의 상층 지휘부가 이런 불법적 사태의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회”가 해체되고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단이 유죄 선고를 받은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으로 우리 군 지휘부 일각에는 여전히 이런 불법적 사태에 기대를 걸고 있으며, 최소한 방조하거나 묵인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취하거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군 상층부의 상당수는 군부독재정권 시절에 체화되고 고착된 정치적 사고와 시대착오적인 반공주의 하비투스에 여전히 안주하고 있다. 이른바 “충암파”라고 불리는 연줄의 존재는 일부 군인의 정치적 일탈이 빚어낸 해프닝이 아니라 자신을 여전히 '구국의 주체'로 간주하는 권위주의적 엘리트 의식과 정치적 신념의 반영이다. 정치사회학자 알프레드 스테판이 지적한 것처럼 이들은 정치에 대한 무력 개입을 국방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신직업주의” 의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군 상층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는 장성들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에 장교를 지낸 상급자 밑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그들 대부분이 졸업한 육군사관학교는 그 자체가 사적 이익 실현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 자원이다. 방첩사령부 사령관 여인형은 부임하자마자 이미 철거된 전두환과 노태우의 초상을 다시 내걸면서 그 후예임을 공공연하게 자랑했지만, 그 상급 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은 이런 행위를 지적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 김용현이 내란주요임무 종사자로 기소되었지만, 자신의 육군사관학교 동창(38기) 대부분이 구국의 결단이라고 격려했다는 보도는 이들의 연줄망이 얼마나 탄탄한 동질감에 터잡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윤석열 전대통령의 비상계엄에 '의도적 항명'으로 헌정을 지키는데 일조한 김형기 특전사 1특전대대장(왼쪽)과 조성현 수방사 제1경비단장. 사진=JBC 뉴스 캡쳐.

군은 공식 사과하고, 참군인에 보상해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군은 미처 이루지 못한 내부 개혁을 완수하고, 우리 사회가 군에 보내는 우려와 불안을 완전히 불식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새롭게 들어서는 정부에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국방부가 중심이 되어 전군 사령관 명의로 12.3비상계엄 사태를 전후한 군의 불법한 행위를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재발방지 조치를 담은 성명서를 즉각적으로 발표해야 한다. 여기에는 불법한 행위에 관여한 정도에 따른 인적 쇄신책과 비상계엄과 내란의 확산 저지에 공을 세운 군인들에 대한 보상 조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

둘째, 헌법 제5조의 군의 정치적 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헌장(憲章)을 제정해서 전군에 배포하고 교육해야 한다. 여기에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쿠데타, 광주학살, 윤석열의 비상계엄 조치에 이르기까지 우리 군의 불의한 행위에 대한 반성과 민주국가에서 군의 정의로운 위상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의지가 확실하게 포함되어야 한다.

군은 가공할 폭력을 지닌 국가기구이다.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이 군의 무력 개입으로 하루아침이 붕괴된 수많은 사례를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기구와 제도의 통제는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통제이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인적 청산만이 우리 군이 내란 세력의 오명을 벗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과제를 달성해야 우리 시민사회는 군을 온전히 신뢰하고 지지하게 될 것이다.


※ 최용주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은 전남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공직을 은퇴한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을 맡았다. 지금은 독립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 <책장 덮기: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진인진 2022), <5.18 푸른눈의 증인>(한림출판사 2020),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2022) 등이 있다. 1958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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