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예술이 되는 걸까? 일상적인 물건도 전시관 울타리만 넘으면 작품이 되는 시대 아닌가? 라벨 하나로 명품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이문 인문학자는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는 객관적 속성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물리적으로 그 차이를 결정할 순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라 ‘美’를 추구하는 활동에서 나오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결과보단 ‘과정’.

박이문 인문학자가 현대 예술에서 독창성을 강조한 이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면 예술이 될 수 있다. 형태가 어떻든 존중과 환호를 받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뚜렷한 예술가의 정신이다. 어떻게 보면 그림일기에 불과할 한 남자의 장난스러운 드로잉을 통해 감정 변화를 경험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형태 이전의 정신을 드로잉
서울 뷰티 먼스 때문인지 DDP 뮤지엄엔 이른 아침부터 저 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서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이 있었다. 주황, 하늘, 빨강의 색 조합뿐만 아니라 그 색깔들이 입혀진 형태도 독특했다. 그렇게 장 줄리앙의 첫 회고전, <그러면, 거기>을 마주했다. 2층 기자 간담회 장소로 바로 직행했다면 놓쳤을 광경이었다.

2층은 한산했다. 맨 앞자리 앉아 질문 하나는 꼭 던지고 오라는 팀장의 지시에 서둘러 나선 보람이 있었다. 10페이지가 넘는 보도자료에 집중하려는 찰나 실내를 가득 메우는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메라에 머리가 걸린다나 뭐라나. 집중할 건 행사장을 찾은 아티스트 얼굴이 아니라 그의 작품일 텐데.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 때문에 미안한 얼굴로 자리 이동을 부탁하는 행사 스태프. 애써 웃으며 옆자리로 옮겼다.

주최 측에서 나눠 준 자료엔 아티스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대목도 있었다. ‘불쾌한 것을 유쾌하게 바꿔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다’는 장 줄리앙은 자신의 드로잉을 소통의 방식으로 제시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통역이 필요 없다’는 이유로. 그래서 작업도 가능한 단순하게 한다고. 앳된 얼굴만큼이나 어린아이 같은 선엔 이유가 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장 줄리앙은 대학 동기인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함께 입장했다. 허 디렉터는 장 줄리앙의 첫 회고전을 함께 기획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아티스트의 ‘동료이자 증인’으로 소개하며 한 남자의 진솔함이 관객들에게도 닿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아티스트의 개인 스케치북부터 시작해 총 12개의 테마로 구성된다. 18년간 작업하며 흥미를 가졌던 모든 것들을 공유하기 싶었기 때문이란다. 아티스트의 작품 세계가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맥락을 파악하기에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제목도 ‘그러면, 거기’다. DDP 잔디 언덕엔 최초 협업 야외 전시 작품도 있다. 아티스트가 대학 입학 후 진행했던 첫 작업 문어를 모티브로 한 ‘Otto’와 허 디렉터와의 협업을 반영한 ‘Fusion’이 그것.

마지막 질문자로 잡은 마이크. 창작 과정에서 보편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 물었다. 늘 ‘모든 종류의 상징과 기호는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그였기에. 게다가 첫눈에 반할만한 아름다움이 아닌데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도 궁금했다. 장 줄리앙은 첫 마디는 ‘I don’t know’. 괜한 질문이었나 생각하는 순간 그는 즉흥성과 진정성을 말했다.

창작 열정에 불을 붙이는 즉흥적인 아이디어의 핵심은 끝까지 유효하지만 그것을 담는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이의 입김이 작용하기도 하니까. 동시에 외풍에도 휘둘리지 않는 진정성 또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단순하고 친근한 외형에 담은 그의 메시지만큼은 변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 줄리앙의 ‘美’는 예술 작품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결과보단 과정.

텍스트가 없는 친절한 예술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전시회의 출구. 아티스트가 직접 작성한 감사 인사가 눈에 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간의 흐름에 맞게 구성된 이곳에서 아티스트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분홍색으로 칠해진 벽에 걸린 회화. 여가생활과 휴가가 주된 주제로 그린 작품 속 배경은 대부분 바다다. 일러스트레이션과 달리 차분한 느낌이다. 배경에 비해 인물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의 회화에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풍경인가 보다.

이어서 등장한 가족. 가족은 장 줄리앙에게 영감의 원천 중 하나다. 그들과 함께한 여행, 산책, 대화는 그가 일상 속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의 밑거름이다. 이러한 밑거름이 축적된 레스코닐(프랑스 북서부 해안 도시)에서의 시간을 담아낸 작품은 일상적이다. 꾸밈없는 모습이라 따뜻함이 온전히 전해져오는 것 같다.

여러 제품을 캔버스 삼아 완성된 것들도 있다. 이른바 오브젝트. 장 줄리앙의 철학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재기 발랄한 시선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 또렷한 섹션이니까. 책부터 서핑보드까지 다양한 형태에 입혀진 그림은 모두 간결했고 유쾌했다. 형형색색의 페이퍼 피플을 지나면 동생 니코와 함께 작업했던 영상의 재료들도 한 데 모여있다. 형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두고 ‘놀이’라고 부를 정도로 즐긴다고 한다.


출발점에 가까워졌다는 뜻일까. 2008년부터 그려 온 드로잉이 나타났다. 전시된 700개 이상의 드로잉을 통해 아티스트의 스타일 변화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금 더 거슬러 가면 100권의 스케치북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것들로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다. 장 줄리앙은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순간들을 기록하기로 유명하다. 그렇게 스케치북에 담긴 일상은 대개 작품의 시작이 된다. 글 대신 드로잉으로 기억된 그의 세상은 직접 마주해보길.

장 줄리앙은 첫 회고전에 대한 소감을 전하는 자리에서 ‘창의적인 삶은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알아도 이름은 몰랐던 이 사람의 스케치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던 이유다. 예술은 형태가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마찬가지.
글 이순민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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