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 느낌 나는 고급 세단" 출시 후 회사는 부도...에쿠스와 경쟁했던 국산 세단

조회 77,7042025. 2. 21.

항공모함이나 우주왕복선이 떠오르는 차명 '엔터프라이즈'는 진취, 기업 등을 뜻하는 영단어로 6글자나 되는 그 길이만큼이나 플래그십 세단에 걸맞은 웅장함이 돋보이는 이름이었습니다. 본래 '마젠티스', '셀렌시아'라는 차명으로 알려졌고, 결국 마젠티스라는 이름으로 결정되어 라디오 광고까지 미리 만들어 놓고 홍보하고 있었는데, 출시 직전 모종의 이유로 지금의 이름으로 교체됐습니다.

사실 여러 개의 차명 후보를 놓고 고민하는 일은 흔하지만 이렇게 광고까지 집행한 뒤 바뀌는 케이스는 참 드문데요. 이 '마젠티스'라는 이름은 그냥 버리기 아까웠던지 훗날 옵티마 리갈과 로체의 유럽 수출명으로 쓰였습니다.

아직 자체 개발 능력이 부족했기에 이 모델 역시 마쯔다의 기함 '2세대 센티아'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모델로 국산 세단 최초로 5m의 벽을 넘어선 낮고 늘씬하게 뻗은 차체, 하드톱 스타일의 멋스러운 프레임리스 도어, 번쩍이는 크롬 휠으로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고 헤드램프와 그릴 등 곳곳을 각지게 다듬어 부드러운 곡선이 강조된 오리지널 센티어에 비해 훨씬 권위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여기에 전통 창호에서 영감을 얻은 라디에이터 그릴의 패턴, 봉황을 형상화한 엠블럼을 부착한 것도 이 엔터프레이즈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부분이었어요.

실내 역시 차급에 걸맞은 고급스러움으로 무장했습니다. 질 좋은 가죽으로 마감한 시트, 고급차의 상징인 아날로그시계를 중심으로 우드 그레인을 폭넓게 두르면서 한눈에 봐도 고급 차다운 분위기를 뽐냈죠. 수평으로 뻗은 센터패시아는 운전자 중심 구조로 꾸몄던 경쟁차들에 비해 더욱 쾌적한 분위기였고, 계단식으로 단정하게 배치한 각종 버튼과 편의장치도 조작 편의성이 높았습니다.

여기에 디지털 계기판, 키를 꽂으면 스티어링 휠과 시트가 운전자를 향해 정렬하는 메모리 시트, 전동 접이식 사이드미러, 앞좌석과 뒷좌석의 온도를 각각 설정할 수 있는 독립식 에어컨 등 당시 기준으로 여러 호화 장비를 가득 품었어요.

플래그십 세단의 덕목인 뒷좌석 편의성 역시 훌륭했습니다. 전 좌석 전동 시트, TV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전용 LCD 모니터는 물론 냉장고, 상석에는 마사지 기능까지 제공하면서 뒤이어 등장한 현대 에쿠스, 쌍용 체어맨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공간을 선사했습니다.

조수석 헤드레스트를 뽑지 않아도 앞으로 젖혀 뒷좌석 VIP에게 쾌적한 시야를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에 더해 조수석 등받이를 레그 서포트로 활용할 수 있는 기능도 당시 플래그십 세단들에서 볼 수 있었던 독특한 부분이었죠.

다만 트렁크 공간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외관에서도 짐작되듯 차체가 낮아 트렁크 높이도 낮은데 냉장고와 CD 체인저 등 각종 편의 기능을 배치하느라 마치 LPG 가스통이 들어차 있는 것만큼이나 공간이 협소했어요.

파워트레인은 마쯔다의 엔진을 손봐 배기량을 늘린 V6 3.6L 엔진과 아이신제 4단 자동 변속기를 장착, V6 3.5L의 경쟁차 다이너스티를 앞지르고 당시 국산 세단 중 가장 강력한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또 포텐샤에 쓰였던 V6 3.0L, 나중에는 V6 2.5L 모델을 함께 제공해 접근성을 높였어요.

일찍이 전륜구동 파워트레인으로 선회해 재미를 보고 있던 현대차와 달리 후륜구동 방식을 사용해 현대 다이너스티, 대우 아카디아 등의 경쟁 모델에 비해 한결 묵직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승차감을 선사했고, 고속주행 시 안정감이 동급 대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행 속도에 따라 감각을 달리하는 스티어링 휠과 전자제어 서스펜션도 안정감을 높이는 데 한몫했고요.

다만 연비가 매우 나쁜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물론 5m가 넘는 대배기량 고급차가 연비가 조금리 만무하겠지만, 동급 중에서도 나쁜 축에 속해서 지금도 엔터프라이즈 하면 '기름 많이 먹는 차'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리시는 어른들이 많을 거예요.

화려한 스펙과 고급스러운 디자인에도 엔터프라이즈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이 차가 막 출시됐을 당시에는 나름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출시 시기를 눈여겨본 분들은 아시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로 소비시장이 얼어붙었고, 이후 독일 벤츠의 기술력을 전면에 내세운 쌍용의 '체어맨', 그런 체어맨을 견제하기 위해 초호화 세단을 표방한 현대 '에쿠스'가 연달아 출시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고객들마저 빼앗겼습니다.

2001년에는 새천년을 맞이해 변경한 밀레니엄 엠블럼을 부착하고 내외관의 각종 사양을 업데이트한 마이너 체인지 모델을 출시했고, 그 사이 대우가 무너지면서 체어맨, 에쿠스와의 3자 대결 구도로 바뀌었음에도 엔터프라이즈의 존재감은 여전히 미미했어요.

'기아'라는 브랜드도 발목을 잡았죠. 오랜 기간 고급차를 만들어 시장을 이끌었던 경쟁사들에 비해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 등의 고난을 겪으며 안 그래도 고급 세단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는데, 출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도가 터지면서 판매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엔터프라이즈 차 자체도 나쁜 연비, 비싼 수리비로 오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좋지 않았던 데다 부품 수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더해졌고 무엇보다 '무너진 회사의 차'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명예와 위상을 중요시하는 플래그십 세단 고객들을 등 돌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현대차와 한 식구가 된 이후로도 판매는 이어졌지만 강화된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출시 5년 만인 2002년 단종됐습니다. 앞에서 다뤘듯 마쯔다의 센티아를 베이스로 만들어져 한 대 한 대 팔릴 때마다 부담스러운 로열티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도 차라리 단종을 시키는 편이 더 속편했을 거예요.

한편 기아차가 자체적으로 준비하던 후속 모델 '프로젝트 SJ'가 있었지만, 역시 엔터프라이즈에 기반을 둔 차량이었고 더구나 그룹 차원에서 엄연히 현대차와 경쟁 구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굳이 새로운 후륜구동 플래그 세단을 출시해 에쿠스를 견제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개발이 중단됐습니다.

한동안 공석이던 기아의 플래그십 세단 자리는 2003년 출시된 '오피러스'가 채웠는데 생뚱맞은 디자인만 봐도 짐작되듯 이 차는 원래 현대 다이너스티의 후속 차량으로 개발되던 '프로젝트 GH'를 넘겨받은 것이었죠.

이후 후륜구동 플래그십에 대한 아쉬움은 오피러스의 후속이자 상위 모델로 포지셔닝된 'KH'가 출시된 2012년이 되어서야 해소됐습니다. KH라는 차명이 결정되기 전 자동차 커뮤니티 등지에서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이 부활하지 않을까 예상하는 분들이 많았었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이 모델은 'K9'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됐죠.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을 썼다면 성과가 조금은 달라졌을까요?

이 급의 차들이 으레 그렇듯 감가가 엄청났기 때문에 중고차 시장에서는 다이너스티와 함께 저렴한 가격의 대형차를 찾는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태생이 일본 고급차라 야쿠자 느낌이 짙게 묻어 나와서인지 어둠의 세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애용했고, 한때 휘황찬란한 램프와 버거워 보이는 휠을 달고 아랫배가 닿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지상고를 낮춘 일명 'VIP 튜닝'을 한 차들이 꽤나 목격되기도 했어요.

여담으로 이 모델을 늘려 만든 리무진 차량이 극소수 존재하는데요. 당시 경쟁차종이었던 에쿠스, 체어맨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부분을 30cm가량 연장한 스트레치드 리무진으로 정식 출시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제품으로 제작된 6대가량만이 당시 기아차 임원진의 의전 차량으로 사용됐습니다. 예전에 소개해드린 SM5 리무진 'SM530L'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 밖에 '스피라'로 잘 알려진 한국의 카로체리아 프로토모터스가 주문 제작 방식의 커스텀 리무진을 제작하던 시절, 일반 모델의 C필러를 길게 연장해 내부를 호화롭게 꾸민 롱힐 베이스 리무진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장기를 살려 지금도 세단과 MPV 리무진을 제작하고 있으니 이 분야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회사예요. 오피러스 리무진 역시 이곳 작품이죠.

본 콘텐츠는 해당 유튜브 채널의 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부도 직전에 기아가 준비한 마지막 플래그십 엔터프라이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페이스리프트 된 '뉴 포텐샤'와 헷갈리긴 하지만 가끔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 낮게 깔린 우아한 자태에 시선을 빼앗기곤 했는데요. 세련된 디자인과 첨단 감각으로 무장했음에도 쟁쟁한 경쟁차들의 그늘에 가려 사라진 비운의 차지만, 상용차부터 스포츠카까지 풀라인업을 갖춘 기아차의 정점에 자리한, 일류 메이커로의 도약을 꿈꿨던 기아차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인 모델이었습니다. 각 브랜드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모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징성이 큰 만큼 어떤 형태로든 그 계보가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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