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대한민국 소비자] 4. 독일 정부, 폭스바겐에 맞서 소송제도 바꿔
21세기 기업은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돈을 벌어 들이지만, 소비자는 자신이 사는 나라의 법률과 법원을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법제도는 삼성, 애플, 폭스바겐, 옥시 같은 글로벌 기업에 유난히 유리합니다. 이들 회사가 휴대전화의 성능을 속이고 엉터리 살균제를 만들어도 한국 소비자는 좀처럼 배상받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 소비자는 한국의 수천 배 넘는 배상을 받습니다. 한국에는 없는 집단소송(Class Action)제도가 있어서입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기업은 더욱 부도덕해지고, 소비자는 더욱 불리해집니다. 글로벌 기업 시대, 한국의 소비자 권리를 5회에 걸쳐 살펴봅니다. 한국에서 집단소송이란 표현이 종종 쓰이지만 사실은 원고가 많은 ‘대규모 소송’을 가리킬 뿐입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 시리즈에서는 집단소송 대신 불가피하게 ‘클래스 액션’이란 미국식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편집자 주>
1. 집단소송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
2. “미국식 안 된다”는 기업들 미국서 소송
3. 삼성전자 '갤럭시 게이트' 한국에선 여유만만
4. 독일 정부, 폭스바겐에 맞서 소송제도 바꿔
삼성전자가 최신 스마트폰 갤럭시 S22의 성능을 의도적으로 낮춰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의혹은 제대로 재판도 못 해보고 끝나는 것일까. 한국과 달리 미국에는 대규모 소비자 피해가 발생한 사건에서 몇 사람이 대표가 돼 소송하고, 승소하면 모든 피해자에게 같은 배상을 하는 클래스 액션(집단소송) 제도가 있다. 특히 기업 측이 증거를 감추지 못하게 하는 증거개시(Discovery·開示) 절차가 클래스 액션에는 함께 있다. 이번 ‘갤럭시 성능 조작 의혹 사건’에서도 클래스 액션이 제기된 상태다.
이와 달리 한국에는 '클래스 액션' 제도가 없다. 언론에서 종종 말하는 집단소송은 원고가 많은 대규모 소송을 잘못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는 증거개시제도도 없다. 이렇게 클래스 액션이 없는 한국에서는 피해자들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일반 민사소송에 나섰지만, 승소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 나오고 있다. 클래스 액션에 쓰이는 증거개시 제도가 없어 삼성 측의 불법행위를 입증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한국 대기업들이 클래스 액션 도입에 반대하면서 내세우는 이유는, 한국 사법제도는 유럽식이라 클래스 액션 같은 미국식 제도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식 사법제도의 대표가 독일 사법제도이다. 그런데 독일이 최근 클래스 액션에 버금가는 제도를 도입했다. 독일 자동차 회사 폭스바겐이 배출가스량을 조작한 디젤 게이트로 미국 등 클래스 액션이 있는 나라에만 천문학적 배상을 하고 독일에는 모르쇠로 일관하자, 독일 정부가 폭스바겐을 겨냥한 개정 민사소송법을 통과시켜 클래스 액션과 유사한 제도를 만든 것이다.
독일,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 겨냥해 ‘독일식 클래스 액션’ 도입
폭스바겐은 2009년부터 친환경‧고효율‧고성능이라고 광고하면서 이른바 클린 디젤 차량을 팔아왔다. 그러다 2015년 미국 환경보호청이 미국에서 판매된 폭스바겐 디젤 차량 48만 2000여 대에 배기가스 조작장치가 설치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 발표가 나오자 폭스바겐은 배기가스 조작장치를 설치해 전 세계에 판 디젤 차량이 1100만 대에 이른다고 시인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곧바로 클래스 액션을 제기했다.
클래스 액션 제기 6개월여 만인 2016년 4월 폭스바겐은 미국 내 폭스바겐 디젤 차량 소유자들에게 153억 달러(20조 6550억원, 1달러 1350원 기준)를 배상하기로 합의했다. 구체적으로 2.0리터 디젤엔진을 단 폭스바겐 차량 소유자 47만 5000명에게 최대 100억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국 소비자들은 폭스바겐 한 대당 5000달러(675만원)~1만달러(1350만원)를 배상받게 됐다. 여기에 더해 차를 무료로 수리할 수도, 게이트 직전 추정 가격에 폭스바겐에 되팔 수도 있도록 했다.
폭스바겐은 이후에도 미국식 클래스 액션 제도가 있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소비자에게도 미국에서와 비슷하게 배상했다. 캐나다에서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와 관련한 클래스 액션이 제기되자 2016년 캐나다에 있는 2.0리터 디젤 차량 소유자들과 손해배상을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문제 차량을 구매한 10만 5000명 소비자에게 21억 캐나다 달러(2조 2050억원, 1캐나다달러 1050원 기준)를 지급하기로 했다. 특히 캐나다 클래스 액션 담당 법원은 미국 클래스 액션 담당 법원과 절차를 조율하면서 재판을 진행했다.
이와 달리 클래스 액션 제도가 없는 한국에서는 소비자들이 개별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에 제기된 3건 소송은 여전히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진행 중이다. 제1심 판결도 2019년과 2020년에야 나왔는데, 차량 판매대금의 10%를 인정한 판결이 하나 있고, 나머지는 100만 원을 인정했다. 이 마저 폭스바겐은 소비자들이 가집행을 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현금공탁을 했다. 폭스바겐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가지고 가리라는 게 사법 분야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즉 손해배상금 100만원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독일 회사인 폭스바겐은 클래스 액션 제도가 있는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는 신속하게 거액을 배상하면서도, 정작 독일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폭스바겐으로서는 독일 소비자 대다수가 소를 제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포괄적인 화해를 할 이유가 없었다. 독일 소비자들은 증거개시 절차도 없이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소송을 꺼렸다고 독일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또 패소할 경우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물어줘야 했다. 그러다 2017년에야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 처음으로 접수됐다. 독일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 피해 차량 소유자 2400만여 명 가운데 극히 일부만 소송을 낸 것이다.
이처럼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에서 미국 소비자들은 6개월여 만에 적지 않은 배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독일 소비자는 해가 두 번 바뀌어도 배상받지 못했다. 그러자 독일에서 독일 소비자가 집단으로 소를 제기할 수단이 없다는 점이 논란이 됐다. 이 무렵인 2017년 9월 독일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우니온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후보와 사회민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 후보가 집단을 이루는 소비자 보호 제도를 마련하자고 합의했다. 누가 이겨도 폭스바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거 이후 메르켈을 총리로 내세운 우니온‧사회민주당 연립정부는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의 소멸시효가 지나기 전에 민사소송법(ZPO)을 개정, 새로운 제도를 마련키로 했다. 이렇게 해서 2018년 11월 표본확인소송(Musterfeststellungsklage) 제도가 시행됐다. 이는 재판의 주요한 쟁점들을 미리 확인하는 제도다. 다만 일정 조건을 갖춘 단체가 소송을 제기하도록 했다. 가령 구성원이 350명 이상, 단체로 등록한 지 4년 이상 등이다. 이 법이 시행된 당시 여기에 해당하는 단체는 독일소비자단체연합(VZBV)뿐이었다.
표본확인소송 제도가 도입되자 2019년 9월 독일 소비자단체가 폭스바겐을 상대로 손해배상책임 확인을 구하는 표본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는 소비자 44만6000여 명이 원고로 참여했다. 그러자 6개월도 되기 전인 2020년 2월 폭스바겐이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처럼 포괄적 합의에 나섰다. 이에 따라 26만 명에 이르는 독일 소비자들은 보유 차량의 모델과 연식에 따라 1350~6257유로(182만원~845만원, 1유로 1350원 기준)를 배상받았다, 소송 비용도 폭스바겐이 부담했다. 이러한 손해배상 액수는 미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27~63%에 불과한 규모다.
독일의 표본확인소송 제도는 미국식 클래스 액션의 대체 제도인 만큼 평가도 갈린다. 문영화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단적 분쟁 해결을 위한 절차적 도구로서 결함을 가지고 있고 비판의 여지가 많다”면서도 “입법 당시 현안이던 폭스바겐 사건에 의한 다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라고 최근 논문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이 제도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폭스바겐 사건의 경우, 제1회 변론기일 전까지 화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던 피고 대리인이 제2회 변론기일에서 재판장에게 분명하게 화해를 권고받고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삼성전자, 불법행위 드러나도 한국 소비자에게 전가 가능
유럽식 사법제도의 대표이자 전 세계 사법제도를 이끄는 독일이지만 자국을 대표하는 폭스바겐의 책임을 묻기 위해 이처럼 민사소송법을 개정했다. 독일은 미국식 클래스 액션에 거부감을 가진 나라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자국 소비자가 부당하게 차별받는 것을 방치하지 않았다. 사법 선진국을 자처하는 한국도 삼성전자의 ‘갤럭시 성능 조작 의혹 사건’을 계기로 민사소송법 등을 개정해, 미국식 클래스 액션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자국 소비자를 역차별하는 일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 원인을 “소프트웨어를 조작해 하드웨어의 한계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한다. 폭스바겐이 배기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면 자동차의 주행 연비가 떨어지고 내구성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폭스바겐의 기술력 한계를 숨기기 위해 배출가스 저감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폭스바겐은 미국 등에만 손해배상을 제대로 하면서, 불법행위에 따른 부담을 클래스 액션을 제기하지 못하는 독일 소비자에게 전가하려 했던 셈이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성능 조작 의혹 사건’을 두고도 비슷한 추측이 나온다. 이 분야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무리수를 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와 관련해 스마트폰 기기의 발열을 제어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적은 전력으로 높은 성능을 내는 중앙처리장치(AP)를 만드는 것, 열전도율이 높은 금속판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소프트웨어로 기능을 억제하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 방법은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고 원가를 상승시킨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삼성전자 갤럭시의 애플리케이션 GOS(Game Optimizing Service)는 마지막 방법에 속한다.
이를 두고 삼성전자가 폭스바겐처럼 기술력의 한계를 소프트웨어 조작으로 숨기려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이들은 “GOS 사태가 발생한 것은 넓게는 안드로이드 진영 전체, 좁게는 삼성전자 AP 설계 및 제작 능력 한계로 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 현재 애플이 자체 설계한 AP(최신 모델은 2021년도 출시된 A15)는 퀄컴이나 삼성전자가 설계한 AP에 비해 성능, 전력 효율, 발열 등 모든 측면에서 훨씬 앞서 있다”고 말한다.
이런 소프트웨어 설정이 위법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삼성전자로서는 한국 소비자에게 제대로 배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폭스바겐이 독일 소비자에게 불법행위 부담을 전가할 수 있던 상황과 비슷하다. 두 나라 모두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은 새롭게 제도를 만들었고, 한국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뉴스타파 이범준 seirots@newstapa.org
Copyright © 뉴스타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