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박정희를 세계적 지도자로 만든 세 가지 ‘깊은 생각’ [송의달 LIVE]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1945년 이후 독립한 150여 신생국 중 유일하게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지도자다. 그의 재임 기간(18년 5개월 10일)을 포함한 1961년부터 80년까지 20년동안 한국이 이룩한 연평균 9%대 성장률은 인류사에서 찾기 힘든 기록이다.
그는 집권 직후부터 8.5%(1962~66년), 9.7%(1967~71년)의 고속성장을 시작해 1971~78년에는 연평균 11% 속도로 한국 경제를 키웠다. 각국과 비교해 독창적이면서 빠른 성공을 일궈낸 박정희의 국가경영술(state-craft)은 세계적 연구대상이 됐다.
2024년도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서울(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기념관을 방문해 가며 그의 발자취를 훑고 있다”며 “한국의 도약은 박정희가 ‘폭발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덕분”이라고 극찬했다.
1961년 5월 군인(육군 소장)이던 박정희는 어떻게 세계적 지도자가 됐을까? 비결을 찾기 위해 그가 1961년과 62년, 63년에 쓴 <지도자도(指導者道)>, <우리 민족의 나갈 길>(약칭 ‘우리 민족’), <국가와 혁명과 나>(약칭 ‘국가와 혁명’)를 살펴봤다. 이 세 권에 그의 후반 생애를 관통하며 행동의 원형(原型)이 된 ‘깊은 생각’ 세 가지가 담겨 있다.
◇①민족과 역사에 대한 통찰
첫 번째는 민족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박정희(1917~79년)는 5000년에 걸친 민족사를 혹독하리만큼 냉정하게 평가했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속사. 고식·안일·무사주의(無事主義)로 표현되는 소아병적인 봉건사회의 한 축도판.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당파 상쟁(相爭)의 역사”(‘국가와 혁명’ 245~247쪽)
그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사대(事大)주의, 게으름, 불로소득 관념, 개척 정신의 결여 같은 나쁜 유산들로 인해 민족성이 악화되고 관존민비(官尊民卑)와 공인(工人)에 대한 천시가 굳어졌다고 했다.(‘우리 민족’ 84~96쪽).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 버려야 옳다”(‘국가와 혁명’ 250쪽)까지 했다.
만족사에 대한 처절하고 전면적인 부정(否定) 위에서 그는 ‘5·16 혁명’의 의의(意義)를 도출해 냈다.
“이것은 멀리는 고, 중세대, 가까이는 이조(李朝) 오백년간의 침체와 왜제(倭帝·일본의 통치) 36년간의 피맺힌 학정, 해방 이후 고질을 총결산하여 다시는 가난하지 아니하고, 약하지 아니하고, 못나지 아니한 예지와 용기와 자신을 가진 신생민족의 우렁찬 신등정(新登頂)이다.”(‘국가와 혁명’, 26쪽)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민족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변곡점이라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우리나라에는 실업자는 250만명, 정기적으로 점심을 굶는 아동은 900만명이 넘었다. 하루 세끼 밥을 다 먹는 사람은 국민의 10%에 불과했다. 1960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80달러)이 필리핀·방글라데시 보다 더 낮은 아시아 최빈국이었다.
박정희는 “1961년 정부 예산과 국방비에서 미국 원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52%, 72.4%”라며 “이러고도 독립된 자유, 민주주의의 주권국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했다. 그에게서 “5·16 혁명은 민족 중흥창업(中興創業)의 마지막 기회”(‘국가와 혁명’ 259쪽)였다.
“핵심은 민족의 산업혁명화에 있다. 먹여놓고, 살려놓고서야 정치가 있고 사회가 보일 것이며 문화에 대한 여유가 있을 것이다. (…) ‘굶주리는 사람 없는 나라’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민족경제의 타개와 부흥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한다.”(‘국가와 혁명’ 248~259)
<박정희가 옳았다>의 저자인 이강호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은 “동아시아 3개국 중 가장 극심한 성리학 원리주의의 나라로 상공업 발전이 가장 미약했던 한국 국민들을 상대로 박정희는 대각성과 새로운 출발을 촉구했다”고 했다.
◇‘할 수 있다’ 정신과 ‘한강변의 기적’
박정희는 ‘총력 속도전’으로 경제발전의 깃발을 들었다. 5·16 두 달 만인 1961년 7월 22일 경제기획원을 세우기 무섭게 62년 1월부터 경제개발 1차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건설부·농촌진흥청(62년), 노동청(63년), 국세청·수산청·산림청(66년)을 만들고 청와대 경제비서실을 경제1, 경제2, 경제3 수석비서관실로 확대개편(67년)했다
국민들에게는 “일어서자! ‘고생하자’”를 외치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었다. 그는 “부지런하고, 싸움하지 말고, 노력하는 국민으로 행동하자. 그 길 만이 사는 길이다. (…) 한국은 20대 청년이다”(‘국가와 혁명’ 220,267쪽)고 말했다.
1961년 4000만 달러이던 수출이 70년 10억 달러로 10년동안 연평균 40%씩 치솟자, 박정희는 1973년 1월 ‘1981년 100억 달러 수출·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골자로 한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또 한번 점프를 꾀했다. 조선·철강·자동차·석유화학 같은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과 현대·삼성·대우 같은 대기업을 키웠다.
1977년에는 아시아에서 일본(1967년)에 이은 두 번째로 100억 달러 수출을 목표보다 4년 앞당겨 달성했다.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승공(勝共)의 길이다”(‘우리 민족’ 2쪽)는 초심(初心)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②후세에 길이 남는 리더십
두 번째는 리더십에 대한 깊은 고뇌와 노력이다. 박정희는 1940년 2월부터 46년 12월까지 청년기 6년여(23세~29세)를 만주군관학교→일본 육사→조선경비사관학교 순서로 보냈다. 군문(軍門)에서 단련된 그는 리더십의 중요성를 절감했다. 박정희의 말이다.
“나라의 안태(安泰)와 민족의 번영은 지도자도(指導者道)의 확립 여하에 달려 있다. (...) 현존하는 위기를 극복하고 국태민안의 확고한 기틀을 세워야 하며 영세만대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져본 바 없는 진정한 ‘지도자도’를 계승해 주어야 한다.”(’지도자도’ 34~35쪽)
그는 “우리 사회가 불타오르겠다는 기름[油] 바다라면, 이 바다에 점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라면서, “안일주의, 이기주의, 방관주의 및 숙명론자로부터 탈각(脫却·벗어 버림)하여 국민이 부르짖는 것을 성취하도록 이끌어가야 한다”(같은 책 10쪽)고 했다.
박정희가 실제로 구상한 리더십은 포용적이고 대담했다. 5·16 혁명을 신랄하게 비판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을 1963년 12월 3공화국 초대 내각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정치적 인연이 전무(全無)한 남덕우 서강대 교수를 1969년 재무장관으로 기용한 게 이를 보여준다. 박정희의 저서 4권에 대한 평설(評說)을 쓴 남정욱 작가는 “그(박정희)는 관록 보다 의욕과 능력, 경력 보다 창의와 실천력을 가진 인재를 등용했고 검증된 인물은 오래 썼다”고 말했다.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7년 6개월), 남덕우 재무장관(이후 경제 부총리)·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각각 9년 3개월) 등이 대표적이다. 중화학공업 책임자인 오원철 경제 제2수석 비서관은 1971년부터 79년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1965년부터 육사 제자인 박태준을 포항제철 사장으로 줄곧 맡겼다.
◇포용하며 예비하는 지도자
박정희는 빈농(貧農) 출신 엘리트들로 ‘활기차고 행동하는 정부’를 꾸린 뒤 차관급 이하 인사(人事)를 장관들에게 일임해 힘을 실어줬다. 1962년 5월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신호탄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66년), 과학기술처(67년), 과학기술진흥법 제정(67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71년) 설립 등으로 ‘과학기술 강국(强國)’ 이라는 획기적인 국정(國政) 방향을 제시했다.
덕분에 1965년 28명이던 한국의 이공계 박사 숫자는 1980년 936명, 1990년엔 6070명으로 불었다. 한국의 경제활동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와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 비중은 현재 세계 1위, 2위이다. 이는 한국 경제 부상(浮上)의 견인차가 됐다.
“지도자는 장래의 일을 예견하고 적절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야 한다”(‘지도자도’ 21쪽)는 말을 120% 이행한 것이다. 1960~70년대는 한국의 엘리트들이 가장 제대로 역할한 시대로 첫손 꼽힌다.
그는 생애 마지막날(1979년 10월 26일)까지 충남 당진 삽교호 준공식 현장을 찾았고 각종 회의와 순시에선 긴말을 삼가고 실무자들 의견까지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의 육성(肉聲)이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판단할 줄 아는 총명(聰明)이 지도자에게 필요하다. 정열과 충분한 신축성이 있어야 한다. (…) 지도자는 그들(전문가)의 조언을 경청하고 포용하는 넒은 아량(雅量)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지도자도’ 20~21쪽)
“격랑 속의 독주(獨舟·외로운 배)를 저어가는 사공”이라 자신을 이름 붙인 박정희는 “파도의 물결이 모질수록 더욱 더 강해져 가고 있고 불퇴전(不退轉·물러서거나 흔들리지 않음)의 결의에 불타고”(‘국가와 혁명’ 12쪽)라고 심경을 밝혔다.
◇③서민과 동고동락...솔선수범의 자세
마지막 세 번째는 국민, 특히 서민(庶民)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恩人)이다.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創建)’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국가와 혁명’ 292쪽)
이는 ‘서민들이 잘 사는 나라’가 그의 최고 통치 목표였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관직을 둘러싼 당쟁과 파당주의, ‘특수 특권의식’ 그리고 이에 물든 정치인들에게는 환멸과 염증을 표했다.
“또다시 전(前)근대적인 파당의식의 포로가 되어 정쟁(政爭)을 일삼는(…) 돈과 감투 분배에 눈이 어두운(…) 사리사욕(私利私慾)으로 뭉친 도당(…) ‘입으로 정치’하는 습성”(’우리 민족’ 24, 201~213쪽)
그는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 사회를 증오하는 소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부패 특권사회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거사한 5·16 혁명(‘국가와 혁명’ 292쪽)”이라며 구(舊)정치 세력과의 단절·차별화를 분명히 했다.
“지도자는 대중과 운명을 같이 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친절하고 겸손하며 모든 어려운 일에 당하여 솔선수범하여 난관을 돌파하며 사(私)를 버리고 오직 국민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숭고한 정신을 그는 가져야 한다.”(‘지도자도’, 18쪽)
박정희는 이 공언(公言)도 지켰다. 재임 중은 물론 사후(死後)에도 본인과 가족, 친·인척과 관련된 비리가 없이 깨끗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다”(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 “박정희의 청렴(淸廉)을 반박할 만한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평가가 해외에서 먼저 나오고 있다.
◇‘특수 특권의식’ 없이 청렴한 일생
양복, 외투, 내의, 구두 등을 모두 국산품으로 쓴 그의 청와대에서 점심은 특별한 행사가 아닌 한 멸치나 고기 국물에 만 기계국수나 우동, 비빔밥이었다. “굶는 국민들이 있는데 나만 잘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1970년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통치 자금에 보태 쓰시라”고 리베이트로 받은 6000만원을 건네자, 박정희는 펴보지도 않고 다시 밀며 “임자 마음대로 쓰게”라며 돌려주었다. “민족 전체를 생각하고 민족의 공동 운명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사리(私利)와 자파(自派)의 이익에만 혈안이 될 수 있겠는가”(‘우리 민족’ 44쪽)라는 자계(自戒·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지킨 것이다.
그는 1965년 2월부터 79년 9월까지 15년 동안 한 달도 빠지지 않고 수출진흥 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회의에 총 299차례 참석했다. 여기에다 헬기와 기차 등으로 전국을 누비며 현장을 세밀하게 챙긴 국가 지도자는 많지 않다.
10·26 사태 다음 날 새벽 국군통합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을 확인한 군의관은 “낡은 허리띠, 도금 벗겨진 넥타이핀, 평범한 세이코 시계 등 대통령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5년 전속 이발사는 “박 대통령께선 해진 러닝셔츠를 입고 계신 적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는 1977년 각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민의료보험을 저소득자·생활무능력자·생활보호대상자부터 우선 도입했다. “서민들이 잘 사는 복지민주국가”(’우리 민족’ 1쪽)를 만들겠다는 절박감에서였다.
◇난세에 재조명되는 박정희
지금부터 45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40분쯤, 박정희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는 소망 대로였다.
그가 소박·검소하게 사는 동안, 국민들은 조금씩 배불리 먹어갔다. 언론을 억압하는 독재자라는 비난속에서도 박정희는 1968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두(年頭)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입 기자들은 물론 언론사 사주(社主), 간부들과 격의 없이 만나 민심을 들으면서 설득도 했다. 그것은 “지도자는 자기가 확신하는 방향과 가장 가능한 방법에 대하여 납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협력을 자극하고 이끌고 나갈 용기를 가진 자”(‘지도자도’ 13쪽)라는 신념의 발로(發露·겉으로 드러남)였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은 박정희는 1961~63년에 쓴 책들에 국민을 향한 약속과 자신에 대한 다짐·결의(決意)를 새겼다. 그리고 이 세상 마지막날까지 ‘국궁진력(鞠躬盡力·국민을 위해 몸을 구부려 온 힘을 다함)’의 자세로 실행에 최선을 다했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는 비전도 없이 한 달만 지나면 무의미해질 정쟁으로 매일을 허송하고 있다. 역사에 무지(無知)한 아마추어 리더십과 감성적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국민들이 정치 지도자들을 더 걱정하는 이 난세(亂世)에 박정희가 품었던 ‘깊은 생각’은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도자는 솔선수범, 희생의 정신, 양심을 가져야 한다.(...) 언행이 일치하고 국가와 국민에 대하여 누구보다 충실하여야 한다. (…) 이와 같이 할 때 피지도자는 마음 속에서부터 지도자를 따를 것이다.”(‘지도자도’ 33~34쪽)
※참고한 책
박정희, 지도자도(1961년 6월 16일)·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년 2월)·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9월)
경제개발의 길목에서(남덕우 회고록, 2009),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갑제, 2012), 박정희가 옳았다(이강호, 2019), 박정희 바로보기(송복 외, 2017), 박정희 새로보기(남정욱·이영훈 외, 2017), 아, 박정희(김정렴 회고록, 1997), Daron Acemoglu & James Robinson, Why Nations Fail?(2012)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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