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크루 열풍 타고 완주하는 여자들 [콘텐츠의 순간들]

복길 2024. 11. 8.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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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소녀단〉은 여성과 운동을 엔진으로 쓰는 스포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은 겸손함과 근성을 보여준다. 최근의 러닝 붐과 맞아떨어진다.
<무쇠소녀단>에서는 여성 연예인 네 명이 ‘철인 3종 경기 대회’에 출전한다. 왼쪽부터 출연자인 유이, 박주현, 진서연, 설인아.ⓒtvN 제공

폴더폰 시절 가장 인기 있던 모바일 게임 중 하나인 〈놈〉은 무작정 달리는 ‘놈’을 따라 버튼을 눌러 장애물을 넘는 게임이다. ‘놈’의 독백이 자아내는 고독한 정서가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놈은 달린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작정 달린다. 놈은 혼자다. 당신도 혼자다···.” 쓸쓸함과 비장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종종 ‘놈’의 실제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 밖으로 달아나는 중이었을까? 아니면 더는 지킬 것이 없어서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중이었을까? 어떤 사연이 있든 달리는 사람의 마음만큼 외롭고 깨끗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몇 년 사이 한국에 불어닥친 ‘러닝 붐’은 크루를 형성해 대회 출전 같은 집단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함께 성취해내는 소모임 형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당근마켓에는 매일 ‘함께 달리실 분’을 구하는 글이 올라오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려면 ‘오픈 런’에 맞먹는 경쟁을 치러야 한다. 공공기관은 역사나 공원 내에 탈의실과 물품 보관함을 증설한다. 기업은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운동 모임을 지원하고 그룹 단위 참가가 가능한 대회들을 개최하고 있다.

여러 사람과 정서적 교류를 하며 건강까지 관리할 수 있는 ‘러닝 크루’는 매력적이다. 특히 코로나19 시대의 단절로 인한 후유증을 회복 중인 ‘MZ 세대’가 깊이 빠져들었다. 이들은 ‘런데이’와 같은 러닝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기록을 재고, SNS에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사진을 남기는 인증 문화를 접목했다. 러닝 크루는 이제 경험을 공유하고 성취를 체감하는 세대 특유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러닝 문화의 과시적 특성을 두고 ‘포모(FOMO) 신드롬’이라 지적하기도 한다. 〈SNL 코리아〉를 비롯한 유튜브 숏폼 코미디 콘텐츠에서 러닝 크루는 러닝이 아닌 헌팅과 교제가 목적인 우스꽝스러운 집단으로 묘사된다. 여성 회원에게 선물 공세를 하는 남성은 ‘여미새(여성에 미친 새Ⅹ)’로, 홍일점이 되고 싶어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를 불사하는 여성은 ‘여왕벌’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화장이 지워지는 것만 걱정하는 여성은 ‘참교육이 필요한 빌런’으로 불린다. 이런 시선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깔린 것은 물론이고 여성들의 신체 활동을 평가하고 폄훼하는 태도도 읽힌다.

유행에 좀 편승하면 어때?

〈무쇠소녀단〉(tvN)은 ‘여성’과 ‘운동’을 각각의 엔진으로 사용하는 스포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여성 연예인 네 명이 ‘철인 3종 경기 대회’에 출전한다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내용이다. 여성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 그들을 생활체육으로 이끌었던 〈골 때리는 그녀들〉 〈오늘부터 운동뚱〉 〈노는 언니〉의 계보에 맞닿아 있다. 방송은 여성의 신체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그 기능과 잠재력에 주목하며 운동으로 얻을 수 있는 성취감, 해방감, 팀워크 등을 섬세하게 다룬다.

수영선수 출신인 유이를 비롯해 배우 진서연, 설인아, 박주현 모두 각자 특기인 운동이 있을 만큼 출연자들은 체육 경험이 많고 기초체력도 좋다. 하지만 마라톤, 사이클, 수영을 모두 해내야 하는 극한의 종목 앞에서 잔뜩 긴장한 상태로 훈련을 시작한다. 보통 이런 방송에서 시청자가 기대하는 것은 도전자들의 치기 어린 승부욕과 서툰 실력에서 비롯되는 좌절 그리고 성장의 서사이지만, 〈무쇠소녀단〉 출연자들은 처음부터 겸손한 태도와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완성형’ 주인공의 서사를 함께 써 내려간다.

무쇠소녀단 포스터. ⓒtvN 제공

진서연은 ‘내가 달리지 않으면 내 아들의 숨이 끊어진다’는 다소 극단적인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5㎞를 40분 안에 완주해냈다. 유이는 123층을 오르는 수직 마라톤 레이스를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1등으로 마친 후 뒤처진 팀원까지 데리러 가는 여유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유이의 모습에 자극받은 설인아는 달리기, 사이클, 수영 세 종목에서 두루 활약하며 단숨에 ‘철인’의 모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넷 중 체력이 제일 약하다고 평가받았던 박주현은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승부욕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매 훈련에서 경이로울 만큼 기록을 단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멍이라곤 없어 보이던 출연자들에게서도 저마다 약점이 드러난다. 러닝과 수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이는 자전거에 공포증이 있고, 체력과 지구력이 20대 못지않은 진서연은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골고루 잘하던 설인아는 뛸 때마다 ‘사이드 스티치(갑작스러운 옆구리 통증)’에 시달리고 사이클에서 에이스급 활약을 했던 박주현은 장거리 달리기에서 번번이 뒤처진다. 방송은 출연자들의 약점을 통해 완벽하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난관을 이겨내는지, 또 그 과정에서 ‘따로 또 같이’ 운동을 하는 ‘크루’의 힘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네 출연자의 모습에는 ‘보여주기식’ 운동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혹독한 극복의 시간이 있다.

네 출연자 외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직장인이자 아마추어 철인 3종 선수 김나현씨는 삶에서 받은 굴욕감을 이기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피트니스 대회 수상자 출신인 81세 임종소씨는 운동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며 하루라도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몸을 일으키라고 충고한다. 프로선수나 유명인이 아닌 이들의 증언은 당장이라도 운동을 시작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와닿는다.

〈무쇠소녀단〉은 이러한 방식으로 출연자들의 서사만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성들의 신체 활동을 적극 권장한다. 기본기가 중요한 마라톤, 수영, 사이클의 초보적 훈련 방법을 전문가의 입을 빌려 알려주고 아마추어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 준비 과정 역시 상세하게 다룬다. 러닝 관련 브랜드와 적극적으로 협업하기도 하고, 지역 마라톤 대회에 출연자들의 참가를 미리 알려서 흥행을 만들기도 하며 방송의 영향력을 화면 밖으로 확장한다.

〈무쇠소녀단〉은 회를 거듭할수록 ‘여성들은 모두 운동에 진심으로 임한다’는 근엄한 확언 대신, ‘유행에 좀 편승하면 어때? 운동은 일단 하는 게 중요해!’라고 산뜻하게 말한다. 고독하고 쓸쓸하게 혼자 달리면 어떻고, ‘러닝 크루의 빌런’이라 손가락질을 받으면 어떠한가? 여전히 달리는 것이 부끄럽다면, 아직도 달리는 이들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면 〈무쇠소녀단〉을 보라. 어떤 말과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달리기’에만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자들이 거기에 있다.

복길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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