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서 즐기는 우아한 피서①] 101년간 스며든 이야기가 풍성한 집...북촌 백인제가옥

1913년 건립. 101년간 네 명의 소유주 거쳐
북촌에서 두 번째로 큰 한옥...역사 문화 가옥으로 문화재 지정
영화 ‘암살’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등 유명 콘텐츠 촬영지로 주목

백인제, 한옥은 자연물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집이다. 촬영=박지영 기자

[이모작뉴스 박지영 기자]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된 요즘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숨 쉬는 집, 한옥에서 살고 싶어한다. 서울에는 공공 한옥이나 역사 가옥으로 지정되어 보존 하고, 활용되는 한옥들이 많다. 대부분 북촌에 밀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꼭 가봐야 하는 한옥이 있다. 보통 ‘꼭’이란 부사가 붙는 경우엔 이런 기준을 적용한다. 크거나, 희소하거나, 볼거리가 많거나, 당대 유명인이 살았거나.

백인제가옥은 100여 년의 세월이 담긴 집이다. 촬영=박지영 기자

백인제 가옥은 사적으로 지정된 안국동 윤보선가(安國洞 尹潽善家) 다음으로 북촌에서 큰 집이다. 근대 한옥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으로 희소성과 볼거리도 충분하다. 백인제는 당대 국내 의술계의 일인자로 평가받았고, 전 재산 기부로 세운 백병원을 통해 ‘인술제세(仁術濟世 :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의 뜻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백인제 가옥은 대로변이 아닌 골목에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북촌에 진입한다면, 가회동주민센터 정류장에 내려 길을 건넌 후, 북촌박물관 옆 손병희 선생 집터 표지석이 있는 골목으로 2, 3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왼쪽에 바로 보인다.

백인제가옥 입구. 입구 오른쪽 건물이 관람 안내소다. 촬영=박지영 기자

서울시 민속문화유산인 백인제 가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 현장인 경교장, AP 통신원으로 1919년 3.1 독립선언과 제암리학살사건을 해외에 알린 앨버트 W. 테일러 부부의 집 딜쿠샤처럼 역사 가옥 박물관의 형태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관람 시간 내 안채와 외부 시설 관람은 가능하지만, 사랑채, 별채 등 일부 내부 시설 입장은 관람 해설 예약자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관람 해설 신청은 서울시공공서비스예약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백인제가옥,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101년간 네 명의 주인을 거친 백인제 가옥...3개국의 건축 양식 혼합돼

백인제 가옥 입구엔 안내소가 있다. 해설 사전 예약자라면 이곳에서 예약 확인을 받은 후 ‘해설 예약자’라 적힌 목걸이형 명찰을 받아 입장하면 된다. 해설 예약자가 아닌 경우엔 자유롭게 보면 된다.

백인제가옥 입구. 계단을 올라 대문간채를 통과한 후 다시 중문간채를 통과하면 내부가 보인다. 촬영=박지영 기자

계단을 올라 조선 사대부가의 솟을대문 형식을 그대로 채용한 대문간채를 통과하면 왼쪽으로 중문간채가 나온다. 이 문을 통과하면 안채와 사랑채로 이어진다. 내부 해설은 안채부터 시작해 사랑채를 실내에서 둘러본 후 야외로 나와 별당채를 보면 마무리된다. 한 시간 미만의 해설이지만 해설사와 함께 보면 마치 이곳에 살았던 듯, 내부 공간들과 기물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해설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각 건축물 밖에서만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

중문간채에서 바라본 안채. 촬영=박지영 기자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건립했다. 친일파인 한상룡의 외삼촌은 이완용으로, 한상룡은 연회를 열 용도로 부와 권력을 동원해 궁궐급의 집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을 마주하는 방향으로, 연회장으로 사용될 집을 지은 것이다. 이후 한성은행, 언론인 최선익을 거쳐 1944년부터 1968년까지 백인제가 소유했다. 한성은행이 소유했던 1928년부터 1935년까진 천도교 단체가 가옥을 임차해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겸 회합 장소로도 사용했다.

사랑채로 가는 별도 입구. 촬영=박지영 기자

백인제는 1928년부터 북촌에서 생활했는데, 그 마지막 거주지가 네 번째 거주지였던 현재의 백인제가옥이다. 1944년부터 이 가옥에서 거주했는데, 1950년 7월 동생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었고, 이후 그의 아내 최경진이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소유로, 최경진은 2008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일부 공간의 쓰임이 바뀌긴 했지만, 살림집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건축가의 이름도, 건축 도면도 남아 있진 않지만, 백인제가옥은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9년 서울시가 백인제 가족으로부터 가옥을 인수 후 문화유산 개·보수 공사를 거쳐 2015년 11월에 역사 가옥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관람 해설이 시작되는 안채. 촬영=박지영 기자

2,460㎡(744평)의 대지 위 백인제 가옥은 가족들이 주로 생활했던 안채와, 여러 소유자가 사교적인 활동을 위한 장소로 사용했던 사랑채, 가옥 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별당채가 주요 건물이다. 안채와 사랑채에는 각각 마당을 두고 있다. 한상룡 거주 당시엔 907평이었지만 최선익 거주 당시 집이 너무 커서 한 부분을 팔았고, 이후 쭉 744평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백인제가옥이라 명명된 만큼, 백인제가 거주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소품과 가구들로 내부가 정돈되어 있다.

안채. 방마다 백인제 거주 당시 시대를 고증한 유물들이 놓여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백인제가옥은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을 사용하여 지은 전통 한옥이다. 우리나라 전통 온돌방이고, 서울 중부지방의 한옥 구조인 ‘ㄷ’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엔 전통 한옥과 일본 그리고 서양의 건축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우선, 사랑채와 안채를 완벽하게 구분 지은 전통 한옥들과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또 여성 공간인 안채는 전통식 바닥인 우물마루를, 사랑채로 연결되는 복도엔 일본식 장마루를 깔았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도, 2층으로 지은 안채의 일부도 온돌 사용을 위해 단층의 집을 짓던 전통 한옥에서 예외적인 건축 형태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이 중에서 제일 눈에 들어온 건 한지문이 아닌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문과 2층 방이다. 특히, 권력을 축적할 목적으로 연회를 자주 열었던 친일파 한상룡 거주 당시엔 이 2층 방이 일본인 남성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로 사용됐다는 해설사의 설명이 인상적이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빨래를 널거나 음식을 말리는 등 집안일의 연장 공간으로 사용된 안채 마당보다 사랑채 앞마당이 더 크다는 것도 새롭다. 백인제가옥 전체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 사랑채와 사랑채 마당 정원이다. 사랑채 마당엔 전통 한옥 마당에 까는 마사토(굵은 모래) 대신 잔디를 깔았다. 여러 대의 주인을 거쳤지만 지금도 사랑채 마당엔 푸르른 잔디가 깔려있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높이 자리한 별당채도 명당이다. 누마루의 형태로, 왕의 연회장인 경회루처럼 이음새 없이 길쭉한 돌로 건축물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집 소유주의 권력이 보통 아니었다는 걸 반증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안채와 사랑채도 아름답지만, 사방으로 열린 창을 통해 보이는 북촌의 모습도 100년의 세월을 축약해 보여준다. 네 명의 소유주를 거치며 100년을 넘긴 건축이지만 몇몇 공간의 쓰임만 달라졌을 뿐 건물 그 자체의 변동은 크지 않아 세월이 스민 그 멋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사람이 모이는 집...유명 영화‧드라마 촬영지

백인제가옥은 그때도 지금도 핫플레이스다. 첫 소유주가 연회를 목적으로 지은 만큼 매우 많은 파티가 열렸고, 그들을 위한 게스트룸도 다수 있었다. 백인제 거주 시에도 의사나 간호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등 손님들은 끊이지 않았다. 백인제가 납북된 이후 별다른 이유 없이도 사람들은 이 집을 많이 방문했다고 한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그중 마당에서 열린 정치 활동도 유명하다. 당시 백인제가옥에는 흥사단 사람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고, 안창호, 이광수, 서재필 등이 백인제가옥에서 열린 가든파티에 초대되어 시국과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이 장면은 현재 사진으로 인화돼 사랑채 거실에 놓여있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백인제가옥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와 드라마에도 등장했다. 안채에 있는 다락에선 영화 ‘암살’의 이정재가 숨어있던 곳이고, 사랑채의 거실 공간은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양철과 진도준이 독대하는 장면에 사용됐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앞서 말한 사랑채 일본식 복도와 안채 복도도 영상 속에 자주 등장하는 핫플이다. 사랑채 거실공간은 조만간 방영될 김태리 주연의 드라마에도 등장할 예정이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

백인제가옥에서는 북촌 음악회도 열린다. 올해는 9월 21일과 10월 19일 토요일에 예정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시기를 맞춰 서울시공공서비스예약시스템을 통해 선착순 접수하면 된다.

한지 대신 유리문이 설치되어 안팎에서 내외부를 볼 수 있다. 촬영=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