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기사들 노상 대국 “대여섯판 두면 하루 금방 간데이”

박호걸 기자 2024. 7. 2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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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번 버스가 간다 <6> 알파고, 게 섰거라

- 부산시청 공원 일대 어르신 붐벼
- 1000원만 내면 장비 제공 받아
- 용두산공원·사직공원도 ‘북적’
- 세병교는 최근 신흥명소로 부상
- 벤치에 줄 그어 바둑판으로 활용

- 기원서는 주로 ‘팀전’ 이뤄져
- 이용금액 하루 2000~5000원
- “저승 갔나” 아찔한 입견제 오가

국제신문 77번 버스 여섯 번째 행선지는 매일 뜨거운 바둑판이 벌어지는 ‘부산시청 광장’이다. 이곳은 10여 년 전부터 노인 놀이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일각에서는 부정적 시선이 있지만, 무료한 노인들은 오늘도 부산시청 앞으로 모인다. 온천천 세병교 밑에도, 노포동 버스터미널 인근도, 바둑과 장기를 두는 노인으로 넘쳐난다. 여윳돈이 있는 어르신은 삼삼오오 기원에 모여 ‘팀전’을 벌인다. 2030에게 ‘롤(리그오브레전드·LOL)’, 4050에는 스타크래프트가 있다면, 노인에게는 바둑이 있는 셈이다.

부산지역에 연일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22일 부산시청 녹음광장 노상에서 어르신들이 바둑 삼매경에 빠져있다. 이원준 기자


▮부산시청 공원의 하루

무더운 여름날 오후 등대광장과 녹음광장의 그늘마다 노인들이 가득하다. 모든 노인의 시선은 각자 벌인 바둑판에 고정됐다. ‘탁’, ‘탁’. 이들은 비록 늙어 허리는 굽었지만, 기평(棋枰)에 돌을 놓는 움직임은 거침없고, 그 소리는 경쾌하다. 홀린 듯 이끌린 구경꾼이 어느새 하나둘 모인다. 이처럼 뜨거운 대국은 광장에서만 20여 군데에서 벌어진다.

김모(73) 할아버지도 친구 이모(72) 할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잡는다. 이 할아버지는 등대광장에 날마다 드나들며 새로 알게 된 바둑 친구다. 두 사람은 이미 아침에 이곳 ‘관리자’에게 각각 1000원씩을 냈다. 이곳에서 바둑판과 바둑알, 그리고 의자를 제공받는 대가로 치르는 비용이다. 하루 1000원만 내면 종일 대국이 가능하다.

연제구 거제동에 사는 김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8시에 광장에 나온다. 뇌경색 치료 후 할 일이 없어 이곳에 산책 삼아 매일 나오는데, 이곳에서 예전에 두던 바둑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등산을 많이 다녔는데 지금은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다. 친구도 없고 몸도 아프니 할 게 없더라. 처음에는 구경만 하다 요즘은 매일 1000원을 내고 종일 바둑을 둔다”고 말했다. 이 할아버지도 친구의 말을 거든다. 그는 “바둑처럼 시간 잘 가는 게 없다. 한 판 두면 짧게는 40분, 길게는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대여섯 판만 두면 하루가 다 간다”고 설명을 보탰다.

등대광장 다른 곳에서는 ‘섯다’ 판이 벌어진다. 신고가 들어갔는지 경찰이 다가왔다. 긴박한 순간, 누군가 “흩어지소”라고 소리치자 노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산개한다. 출동한 경찰은 현장을 5분가량 둘러보다 다시 자리를 뜬다. 먼 산을 바라보던 노인들은 다시 모여 판을 벌인다. 저녁 시간이 되자 배가 고파진 노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뜬다.

▮운동하러 나왔다 한판

국제신문 박호걸 기자(오른쪽)가 세병교 아래에서 어르신과 장기를 두는 모습. 이원준 기자 windstorm@kookje.co.kr


야외에서 바둑판이 벌어지는 건 부산시청 광장뿐만 아니다. 중구 용두산공원, 동래구 사직공원, 금정구 노포동 부산동부버스터미널 등도 노인 기사(棋士)가 줄을 잇는다. 그중에서도 온천천 세병교 아래는 떠오르는 신흥 명소다. 이곳에서 만난 정모(79) 할아버지는 “바둑 6급인데 시청 등대광장을 주로 간다. 오늘은 여기 분위기를 보러 왔다”며 “이곳은 바둑·장기가 절반씩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 할아버지는 “바둑판이 벌어지는 곳마다 조금씩 룰과 특성이 다르다. 등대광장과 사직광장이 여전히 바둑이 많은데, 노포동은 주로 장기가 많은 식이다. 요즘 용두산은 바둑 두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며 정보를 공유했다.

온천천은 운동하러 나왔다 간단히 즐기기 편하다. 또 이곳은 별도의 관리자가 없어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단, 바둑알이나 장기알은 본인이 직접 챙겨와야 한다.

바둑판은 세병교 아래에 설치된 특이한 디자인의 벤치를 활용한다. 2022년 4월 연제구는 이곳에 벤치 8개를 설치했다. 벤치 중간 부분의 높이를 한 단 올려 나무로 덧댄 디자인을 차용했다. 커피를 두게 하거나 노숙인이 눕지 말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노인들은 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직접 자를 대고 유성 매직으로 그리거나 칼로 파내 바둑판과 장기판으로 활용했다. 최모(81)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장기판도 들고 다녔는데 이제는 알만 들고 다닌다. 한 시간쯤 운동하고 땀 나면 여기 그늘에 쉬면서 한판 두면 참 좋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여기 뭐하러 왔노.”

40대 초반의 취재진 실력이 궁금했던지 김모(80) 할아버지가 승부를 걸어왔다. “바둑은 못 둡니다. 장기 한 수 배우겠습니다”고 응수했다. 김 할아버지는 자기 자전거에 걸어둔 검은 봉지에서 장기알을 꺼내왔다. 긴장한 기자와 달리 김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꺼내 쓰더니 허밍을 하며 여유롭게 장기알을 세팅했다. 승부가 시작되자 4, 5명의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차(車)가 활로를 개척하니 마(馬)를 움직여 대응한다. 대국이 계속 진행되자 여기저기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녀석의 장기가 영 못마땅했던지 훈수가 쏟아진다. “차 죽는다”, “마가 나가라”, “바꿔 먹는 수밖에 없다”. 주변의 도움에도 불구, 결국 대국은 기자의 패배로 막이 내렸다. 김 씨 할아버지는 만족한 듯 장기알을 다시 검은 봉지에 넣고선 자전거를 타고 홀연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원에서 펼치는 ‘팀전’

기원은 친구끼리 모여 ‘팀전’을 하기 딱 맞다. 일종의 피시방이다. 기원 이용 금액은 하루 2000~5000원 선으로, 야외 대국장에 비해서는 다소 비싸다. 이에 수입이 있거나 주머니 사정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노인이 주로 기원을 이용한다. 대신 커피는 물론, 한 번씩 떡이나 막걸리가 제공되기도 한다.

최모(79) 할아버지도 금정구 부곡동의 한 기원으로 향했다. 이날은 최 씨 할아버지를 포함해 동네 바둑 친구 여섯 명이 게임에 참여했다. 제비뽑기로 조를 나누고, 급수에 따라 돌을 접어준 뒤 본격적인 대국이 시작됐다.

“집에 갔나, 저승 갔나.” 장고를 거듭하는 상대에게 주는 입견제도 예사롭지 않다. 50분의 승부 끝에 대국에서 진 최 씨 할아버지가 투덜거리면서 지갑에서 벌금 2000원을 꺼냈다. 최 씨 할아버지는 이날 총 여섯 번을 둬 다섯 번 지고, 한 번 이겼다. 최 씨 할아버지와 상대는 각각 1만 원과 2000원을 벌금으로 냈다. 다른 조까지 총 3만6000원의 벌금이 모였다.

어느새 저녁이 됐다. 최 씨 할아버지와 친구들은 ‘회비’로 고깃집에서 반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최 씨 할아버지는 “이렇게 놀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밥값이 부족하면 부족분은 돈 많은 장 씨가 낸다”며 웃었다. 뜬금없이 눈탱이(?)를 맞게 된 장 씨 할아버지가 볼멘소리를 하자 “얀마! 낼모레 죽을 놈이 돈 아껴서 뭐 할래”라는 친구들의 타박이 이어졌다. 체념한 장 씨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그래. 고깃집 가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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