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열없다’의 어원 이야기

그렇다고 해서 ‘열없다’ 대신에 ‘일없다’를 쓸 수는 없다. 지금은 학생들이 북한에서 쓰는 말 ‘일없습네다’와 같은 용어를 대신해서 ‘열없습네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남•북한의 언어가 이질화되는 것이 안타까운 차에 이러한 말을 들으면 더욱 근심이 깊어진다.
원래 ‘열없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일없다’는 말의 의미는 ‘1. 필요가 없다 2. 걱정하거나 꺼릴 것이 없다’의 뜻으로 쓴다. 예문으로는
월급도 일없고 일만 가르쳐 주면 그만이니 어린아이 하나 써 달라고 졸라 대었다.
그 아이는 약 한 첩이면 일없을 아이다.
와 같이 쓴다. 그러나 북한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고 있음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보통 북한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일없습니다’라는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란다. “이 상황에 필요한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북한에서 ‘일없다’의 의미는 ‘괜찮다(문제없다, 상관없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어에서도 실상은 ‘걱정하거나 개의할 필요가 없다’ 혹은 ‘소용이나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가 중심이다.
이러한 북한말을 우리말 ‘일없다’로 대체하면서 장난으로 ‘열없다’로 쓰는 아이들을 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말에는 ‘열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 뜻은 ‘겸연쩍고 쑥스럽다, 겁이 많고 다부지지 못하다, 어설프고 짜임새가 없다’ 등이다. 속담에 “열없는 색시 달밤에 삿갓 쓴다.”는 말이 있다. 이 뜻은 겸연쩍고 쑥스러워 색시가 달밤에 삿갓을 쓴다는 것이니 ‘정신이 없어 망령된 행동을 한다.’는 말이다. 옛문헌에 “열업시 안ㅅ다(獃坐)<漢淸文鑑 198쪽>”라고 되어 있으니 여기서 ‘열없다’의 의미는 ‘우두커니’라고 보아야 한다. ‘애(獃)’가 ‘못 생기다, 어리석다, 우두커니 서 있다’의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없이 앉아 있다’는 ‘우두커니 앉아 있다’로 풀 수 있다. 또한 ‘열’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쓸개’를 이른다고 한다(서정범, <새우리말 어원사전>). 필자가 과거에 한국어 문화문법을 말하면서 ‘쓸개 빠진 놈’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쓸개는 우리말 ‘겁’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쓸개 빠진 놈은 ‘겁이 많아서 여기저기 눈치만 보고 아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열없다’에서 ‘열’도 쓸개와 관계있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즉 쓸개 빠진 듯이 앉아 있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열없다’의 방언으로 흔히 ‘열적다’라는 표현도 한다. ‘열(쓸개)’이 ‘없거나 적은(작은) 것’은 ‘담(膽 : 쓸개)이 크지 못하여 겁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바보나 멍청이, 혹은 줏대가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쓸개 빠진 사람’이라고 하며, 그럴 때 ‘열없는 놈’이라고도 한다. 이제 ‘열없다’의 예문을 보자.
아가씨는 박 목사의 소개에 열없게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하였다.
제 말을 열없는 우스갯소리로 듣지 마세요.
등과 같이 쓴다. 이렇게 우리말 좋은 뜻을 지닌 단어를 북한어와 이상하게 엮어서 ‘일없다’의 변형으로 써서는 안 된다. 장난이나 유행어로 여길지는 몰라도 전문가가 볼 때는 우리말의 오용이 분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본래의 의미대로 쓸 것을 권한다.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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