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㊼‘황금의 92학번’ 최대어 임선동의 LG 지각 입단과 이별

“그동안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제 자신의 잘못도 있고 제도상의 문제점도 있다고 봅니다. 이제 LG 유니폼을 입은 만큼 열심히 해서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1996년 11월 12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LG 트윈스 구단 사무실에서 한 거물급 신인 선수의 입단식이 거행됐다. 그가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임선동. 1991년 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초고교급’ 천재투수. LG는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속에서 1차지명에 성공했지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나고서야 가까스로 그에게 LG 줄무늬 유니폼을 입힐 수 있었다.
대학 진출 후 4년의 기다림. 그리고 1년 가까이 벌였던 지리한 법정싸움. LG 최종준 단장은 임선동의 입단 소감을 들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2년간의 시한부 만남이었다. 이별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슬픈 ‘계약결혼’이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47번째 주제는 ‘황금의 92학번’ 중 최대어 투수 임선동의 입단 이야기다. 그의 입단 과정은 LG 트윈스 역사뿐만 아니라 KBO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KBO리그에 FA(프리에이전트) 제도를 도입시킨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조성민 박찬호를 능가했던 임선동…1차지명과 ‘황금의 92학번’
[엘팬알백]㉗화에서 자세히 소개한 것처럼 LG는 1992년 휘문고 투수 임선동을 1차지명하게 된다. 당시 임선동은 우람한 체격과 유연한 투구폼으로 시속 150㎞의 빠른 공을 던지면서도 제구력과 경기운영능력까지 갖추고 있어 ‘제2의 선동열’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한국야구사에는 ‘황금의 92학번’으로 불리는 1973년생들이 있는데 훗날 메이저리거가 되는 박찬호(공주고)를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다. 사실 박찬호는 고교 시절만 해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고교 시절 명성만 놓고 보면 임선동 조성민(신일고), 손경수(경기고)가 빅3로 꼽혔다. 이들 중에서도 임선동은 단연 최고 유망주로 평가받았다.
LG나 OB나 임선동을 잡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결국 LG가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기면서 최대어 임선동을 1차지명하는 데 성공했다.

임선동에 이은 넘버2는 조성민. 하지만 OB는 조성민 대신 넘버3 손경수를 1차지명했다. 모두가 놀랐던 선택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LG가 이미 손경수와 입단 계약서를 썼기 때문이었다. OB가 조성민을 선택할 경우 LG가 톱3 중 임선동과 손경수 2명을 획득하는 상황이었다. 조성민은 어차피 고려대 진학 의사가 확고했다. 그러자 OB는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 일단 손경수를 1차지명해 LG와 계약을 무산시킨 뒤 4년 후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겨 빅3 중 2명(조성민+손경수)을 잡겠다는 계산을 했다.

사실 4년 후 주사위 던지기에서 누가 이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LG가 이기면 임선동에 이어 조성민까지 잡을 수 있게 돼 LG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그래서 LG는 “손경수와 계약서를 썼지만 계약금을 건네지 않았다”며 OB에 순순히 양보를 했다.
LG는 임선동을 1차지명한 뒤 곧바로 입단시키기 위해 역대급 계약금을 제시하며 공을 들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연세대 김충남 감독이 임선동을 데리고 부산으로 잠적했기 때문이었다.
임선동은 결국 연세대로 진학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선수들은 대학 진학 후 태극마크를 다는 것을 엘리트 코스로 여겼다. LG로서는 아쉽지만 4년 후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복병…실업팀 현대 피닉스 창단과 임선동의 입단
임선동은 연세대 진학 후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등 예상했던 항로로 순항하고 있었다. LG는 1994년 이광환 감독의 신바람 야구로 창단 후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LG는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이미 류지현, 김재현, 서용빈이라는 신인 삼총사가 나타나 야수진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알렸고, 이상훈이라는 젊은 좌완 에이스는 다승왕에 올랐다. LG로선 임선동이 대학 졸업 후 합류한다면 KBO 최강의 좌우 원투펀치를 구성할 수 있다는 단꿈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994년 11월에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팀이 창단된 것. 단순한 실업팀 하나가 추가된 게 아니었다. 고요하던 한국 야구계에 평지풍파가 일었다.
사실 현대그룹은 그 이전부터 야구계에 진입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1992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참패를 한 뒤 실추된 이미지를 개선하고 그룹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프로야구단 창단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기존 프로구단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그동안 축구, 배구, 농구 등 다른 스포츠에서 현대가 돈공세로 어떻게 판을 휘저었는지를 목도해왔기에 필사적으로 프로야구판 진입을 저지했다. 기존 회원사(8개구단)의 승인 없이는 프로야구 제9구단 창단은 불가능했다.
그러자 현대그룹은 우회작전을 썼다. 우선 1994년 3월 현대석유화학 이현태 회장을 공석인 대한야구협회장 자리에 앉혔다. 이어 11월 28일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면서 프로야구 진입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현대 피닉스는 말이 실업팀이지 기존 프로팀의 입이 벌어질 정도로 대대적인 금전공세를 펼쳤다. 아마추어 최대어들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프로야구에서는 1차지명 선수라도 계약금은 1억원대(1993년 입단한 이상훈의 최고 계약금이 1억8800만원) 수준이었지만, 현대 피닉스는 거기에 몇 배에 달하는 몸값을 안기며 아마추어 선수들을 포획했다.

1995년 롯데 1차지명 대상자인 연세대 문동환에게는 계약금 3억원과 아파트 등 총 4억 원 수준의 대우를 해주며 입도선매했고, 웬만한 대어급 선수들에게도 1~2억 원을 우습게 안겼다. LG의 1차지명 외야수 고려대 심재학에게도 LG가 제시한 금액 그 이상의 계약금을 제시했다.
이들뿐만 아니었다. “캐치볼만 할 줄 알아도 억대를 받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대졸 선수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금전공세를 퍼부었다. 기존 프로팀에서 지명을 받은 선수건 안 받은 선수건 가리지 않았다.
현대는 ‘너희들이 우리를 프로야구판에 끼워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해보겠다’는 듯 기존의 시장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현대 피닉스는 1994년 11월 창단식 때까지 이미 14명의 선수들을 긁어모았다.
현대 피닉스가 내세운 창단 명분도 훌륭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국가대표급 대학의 우수선수들을 한꺼번에 모아 관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로구단들은 비상이 걸렸다. 지명 선수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종전 시장가의 몇 배에 달하는 계약금으로 현대 피닉스의 금전공세에 맞서야만 했다. 자연히 선수 몸값은 폭등했다.

LG는 1995년 1차지명 선수인 국가대표 4번타자 심재학에게 KBO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인 2억1000만 원을 안기며 가까스로 영입에 성공했다. 1년 전 1차지명 선수인 류지현(심재학의 충암고 1년 선배)의 계약금 7500만 원에 비하면 거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오히려 “3억 원을 주겠다”는 현대 피닉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LG에 입단해 준 심재학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LG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충격을 받는다. 1996년 입단할 것으로 철썩같이 믿었던 아마추어 최대어 투수 임선동이 1995년 5월 11일 현대 피닉스와 비밀 입단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9월 15일자 일간스포츠 특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LG 구단은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발칵 뒤집혔다.
현대 피닉스가 임선동에게 안긴 계약금은 자그마치 7억 원이었다. 1993년 LG에 입단한 이상훈 계약금의 3.7배가 넘는 거액이었다.
임선동뿐만 아니었다. 연세대 동기 박재홍도 4억3000만 원의 대우로 현대 피닉스와 계약해 1992년 그를 1차지명한 해태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현대 피닉스의 금전공세는 갈수록 더 심해졌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파도…일본 다이에와 임선동의 비밀계약
현대 피닉스를 통해 KBO리그를 위협하던 현대그룹은 1995년 9월 1일 기자회견을 갖고 인천·경기도·강원도를 프랜차이즈로 하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기존 구단들은 떨떠름했지만 현대의 태평양 프로야구단 인수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도 반대를 한다면 앞으로 실업팀 현대 피닉스와 더 큰 돈싸움을 벌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항간에는 현대가 다른 기업들과 함께 새로운 프로야구 리그를 결성하려고 움직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현대를 KBO리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현대는 프로야구단 창단이라는 숙원사업을 이뤘다. 팬 공모를 통해 프로야구단 명칭을 현대 유니콘스로 정했다.
현대는 KBO리그에서 공생하기 위해서는 신인 지명 등 기존 질서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피닉스 측은 “계약금만 반환하면 얼마든지 보내주겠다”며 각 구단이 지명한 선수들을 풀어주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LG로서도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 빼앗겼던 임선동을 되찾을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또 예상하지 못한 2차 파도가 일었다. 이번에는 대한해협 건너 일본에서 몰려온 거대한 파도였다.
임선동이 10월 9일 일본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 전신)와 비밀계약을 한 것이었다. 계약기간 8년에 계약금 1억5000만 엔, 연봉 1200만 엔의 조건. 1993년 일본 최고 유망주 타자 마쓰이 히데키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받은 계약금과 같았다.

사실 임선동으로선 동기생 박찬호와 조성민이 먼저 해외 진출을 하자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박찬호는 한양대 2학년을 중퇴하고 1994년 1월 LA 다저스와 계약(계약금 120만 달러)한 뒤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같은 해 고려대 조성민은 일본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입단에 합의(계약금 1억5000만 엔)했다. 다만 조성민은 고려대 졸업 후 1996년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기로 했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임선동은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고교 시절부터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박찬호와 조성민이 줄줄이 세계 최고의 무대로 나가는 걸 보고 해외 진출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일본 다이에 구단이 임선동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다이에 구단이 결정적으로 임선동에게 꽂힌 건 1995년 여름 일본 후쿠오카돔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투구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8월 31일 준결승전에 선발등판한 임선동은 일본을 상대로 9이닝 5안타 1실점 완투승을 올리며 한국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후쿠오카를 프랜차이즈로 삼는 다이에 구단 관계자들이 이 경기를 지켜본 뒤 임선동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접한 LG 구단은 또다시 비상이 걸렸다.

◆길고 긴 법정싸움…다이에 입단 불발과 임선동 자해 소동
LG로선 손 놓고 방관할 수 없는 문제였다. 1차지명 선수를 눈 뜨고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 이는 LG뿐만 아니라 KBO 전체 문제로 비화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LG는 KBO를 앞세워 일본야구기구인 JBO(현 NPB) 측에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는 1995년 11월 2일 한일슈퍼게임을 앞두고 KBO 김기춘 총재가 일본의 요시쿠니 이치로 커미셔너와 만나 “한일 양국의 기본질서를 존중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요시쿠니 커미셔너는 이 자리에서 ‘임선동의 지명권을 갖고 있는 LG의 사전 동의 없이는 다이에가 임선동을 스카우트하더라도 일본구단 선수등록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것으로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임선동 측에서 11월 23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 ‘지명권 효력정지 및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한 것. 이로써 임선동과 LG의 1차지명과 입단 문제는 법정소송으로 비화한다.
12월 28일 남부지원 민사합의1부는 “LG는 임선동에 대한 보유권을 행사할 이유가 없다”며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임선동은 이를 근거로 1996년 1월 22일 서울지법에 LG를 상대로 ‘지명권 무효확인 본안소송’을 제기했다.
임선동은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학점미달로 연세대를 졸업하지 못하게 됐고, 2월 28일 KBO 신인등록 마감시한을 넘기면서 1996년 LG 입단도 불발되고 말았다.

임선동이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되면서 96애틀랜타올림픽 참가를 준비하고 있던 5월 16일, 서울지법 민사합의41부는 ‘임선동에 대한 LG의 지명권 없음’을 확인한다고 판결했다. 법정싸움에서 임선동 측이 승리한 것이다.
LG나 KBO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신인드래프트와 보유권을 인정하고 있기에 이런 판결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임선동은 이에 힘을 얻어 5월 29일 일본야구기구를 방문해 다이에 호크스 선수등록을 재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야구기구 측에서 “KBO 총재와 합의를 존중해 등록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결국 다이에 구단의 세토야마 류조 대표도 5월 30일 후쿠오카에서 “입단과 계약문제를 모두 백지화하기로 임선동과 합의했다”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진출이 좌절된 임선동은 현지에서 기자회견도 거절한 채 귀국했다. 그리고는 6월 1일 새벽 연세대 인근에서 선배와 술을 마시다 술김에 오른손 주먹으로 벽을 쳐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오른손을 깁스하게 만든 이 부상은 임선동에게 구위 하락을 가져오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3차 강제조정 “임선동과 LG는 2년간 동거하라”
LG는 6월 12일 1심판결에 불복해 서울고등법원(홍일표 부장판사)에 항소를 했다.
임선동의 다이에 입단은 불발됐지만 1심판결 내용을 놓고 보면 KBO 신인지명 제도와 스카우트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문제이기에 다시 한번 법의 판단을 구했다. 당연히 KBO와 다른 구단에서도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이 돼 있었다.
8월 16일 1차심리에 이어 두 차례의 조정이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홍일표 부장판사는 10월 28일 강제조정을 단행했다.
이 조정에 따르면 ▲임선동은 1996년 11월 5일까지 LG와 입단계약을 하고 ▲임선동이 현대 피닉스와 맺은 계약조건(계약금 7억 원)과 법정이자를 LG가 대신 부담하며 ▲임선동이 원할 경우 2년 후 다른 팀으로의 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임선동은 무조건 LG에 입단하되 본인 의사에 따라 2년 후에는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점이었다.
이로써 임선동은 1982년 KBO 출범 후 국내 선수로는 최초로 자유계약선수 신분을 확보하게 됐다. 아울러 1차지명 선수의 영구 보유권은 사실상 KBO가 폐기해야 하는 규약의 조항이 된 셈이다.
LG가 현대 피닉스에 지불해야하는 금액도 논란이 됐다. 특히 법정이자를 놓고 양측의 해석이 엇갈려 1년 이상 논쟁을 벌였다. 결국 1997년 10월 2일 LG는 원금인 7억 원을 현대 피닉스에 지급하고, 이자 2억7000만 원은 1998년에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임선동이 LG 입단하던 날
1996년 11월 12일 오후 3시. 임선동은 서울 대치동 LG 트윈스 사무실에서 마침내 LG 입단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참 고단한 여정이었다. 1991년 10월 25일 LG가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기면서 1차지명을 한 임선동이 줄무늬 유니폼을 입기까지 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LG 구단 관계자들이나 임선동이나 그동안의 일들이 머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임선동은 등번호 33번을 받았다. MBC 청룡부터 LG 트윈스에 이르기까지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한 이광은의 번호였다. 이광은이 1991년을 끝으로 은퇴하자 LG 구단은 잠정결번으로 처리해놓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KBO리그엔 영구결번 문화가 확산되기 전이었다.
LG가 임선동에게 33번을 물려준 건 향후 2년이 아니라 그 이상 오랜 시간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잡아 달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입단 소감은?
“유니폼을 입고 나니 기분이 새롭다. 그동안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나 자신의 잘못도 있고 제도상의 문제점도 있다. 이제 LG 유니폼을 입은 만큼 열심히 해서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겠다.”
-2년 후 진로는?
“일단 입단한 마당에 2년 뒤의 말은 할 수 없다. 단지 열심히 훈련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난 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 현대로의 트레이드 역시 현재 생각할 형편이 아니다. 단지 언젠가 외국 무대에서 뛸 수 있으면 하는 기대는 있다.
-현재 몸상태는?
”올해 쉬었기 때문에 살은 좀 쪘지만 아픈 데는 없다. 체계적으로 훈련하면 내년에 던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성적을 예상하는가?
“몇 승을 올리겠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선발투수진에 끼여 1년 동안 계속 던지는 게 중요하다. 첫해 성적을 올리고 난 뒤 나를 평가해달라. 대학 시절에는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도 통했지만 프로에서는 힘들다고 보고 체인지업 등 변화구 보완에 주력하겠다.”

◆첫해 11승, 이듬해 1승…롤러코스터
임선동은 입단식을 마치자마자 구리 2군 속소에 입소했다. 몸 상태를 전체적으로 점검한 뒤 프로 무대에 나서기 위한 몸 만들기에 돌입하기 위해서였다.
임선동은 “다른 선수들은 휴가를 즐기는 연말이지만 나는 쉬지 않겠다”면서 하루 빨리 몸부터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LG와 법정싸움을 하느라 1년 동안 운동을 거의 하지 못해 몸무게가 많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통해 선발투수로 낙점받은 임선동은 1997년 4월 15일 프로 데뷔전에서 패전의 쓴맛을 봤다.
해태 조계현과 선발 맞대결을 한 임선동은 1회초 시작부터 이종범의 현란한 플레이에 넋을 잃었다.
이종범은 데뷔 첫 투구에 좌전안타로 나간 뒤 2구째에 2루를 훔쳤다. 임선동은 1회초에만 3실점했다.
LG가 1회말 2점, 3회말 3점을 뽑아 5-3으로 역전하자 이종범이 4회초 중월 3점홈런을 터뜨려 6-5로 재역전됐다.
임선동은 5.2이닝 동안 무려 116개의 투구수를 찍으며 7안타 4사사구 6실점으로 부진했다. 최고구속은 147㎞였다.
이날 양 팀 타선이 폭발하면서 연장 10회 승부 끝에 LG가 7-6으로 이겼다. 임선동은 승패 없이 물러났다. 내용적으로나 결과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한 호된 신고식을 했다.
임선동은 두 번째 등판인 4월 20일 사직 롯데전에서 8이닝 1실점 역투로 팀의 5-1 승리를 이끌며 데뷔 첫 승을 따냈다.
하지만 이날 최고 구속은 시속 143㎞. 고교 시절 시속 150㎞ 웃도는 강속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총 투구수 112구 중 절반 가량을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다양한 변화구로 썼다.
임선동은 1997년 선발로만 22경기에 등판해 11승7패, 평균자책점 3.52를 기록했다. 신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고교 시절의 구속을 되찾지 못했지만 특유의 제구력과 경기운영 능력, 요령으로 프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임선동은 LG의 포스트시즌에서도 중용됐다. 삼성과 격돌한 플레이오프와 해태와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2차전과 5차전에 선발등판했다.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5.2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고, 5차전에서는 2.1이닝 2실점한 뒤 강판했다. 모두 승패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5이닝 1실점으로 팀의 10-1 승리를 이끌고 생애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올렸다. 하지만 5차전에서는 4.1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면서 해태의 우승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구단과 팬들은 임선동이 첫해의 경험을 발판 삼아 이듬해엔 더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웬걸. 1998년에는 15경기(선발 12경기)에 등판해 1승6패, 평균자책점 6.94로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임선동을 향해 ‘어차피 팀을 떠날 예정이라 태업하는 것 아니냐’며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임선동 “현대로 트레이드해달라”…안병원+현금 7억 원으로 교환
2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났다. 잔류냐 이적이냐. 임선동이 어떤 선택을 할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임선동은 오랜 고민 끝에 1998년 11월 30일 LG 구단사무실에서 최종준 단장과 만난 뒤 “현대로 트레이드해달라”고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최 단장은 임선동과 면담을 한 뒤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팀 잔류를 바라지만 원하는 대로 트레이드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LG는 현대와 한 달 동안 트레이드 조건을 놓고 기나긴 줄다리기를 했다. 결국 이듬해인 1999년 1월 3일 트레이드 합의에 이르렀다.
LG는 현대 투수 안병원과 함께 현금 7억 원을 받는 조건으로 임선동을 넘겼다.
안병원은 1973년생으로 임선동과 동갑인 우완 투수였다. 말하자면 ‘황금의 92학번’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원주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1992년 롯데 염종석(17승)과 빙그레 정민철(14승)이 빼어난 성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안병원도 첫해 10승8패, 2세이브를 거두며 맹활약했다. 8월 26일 OB전에서는 역대 최연소 완봉승 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안병원은 1994년에도 11승을 올리며 태평양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힘을 보탰지만 그 이후 매년 이런저런 부상에 시달리면서 기대만큼의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 즈음 “이름에 ‘병원’이 있어서 부상이 잦은 것 아니냐”는 웃픈(?)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안병원은 1998년 20경기에 등판해 2승1세이브, 평균자책점 4.21을 기록하고, 당시까지 KBO 7년간 개인통산 39승50패, 4세이브를 기록하고 있었다. LG로선 부상만 잘 다스리면 마운드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투수로 판단했다.
갖가지 사연이 덕지덕지 붙은 LG와 임선동의 애증의 인연은 이렇게 짧게 마무리됐다. 긴 기다림 끝에 어렵게 만남이 성사됐지만 그 결말은 허무했다.

◆2년간의 동거 후 이별…임선동은 왜 과거의 공을 잃어버렸을까
임선동은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은 첫해인 1999년엔 9경기에 등판해 0승1패, 평균자책점 8.05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2000년 놀라운 변신을 하게 된다. 18승을 거두면서 현대 정민태 김수경과 함께 3명이 공동 다승왕에 오르는 보기 드문 사건(?)을 만들었다. 아울러 탈삼진 174개로 탈삼진왕에 올랐다.
이런 활약 속에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가 되는 등 개인적으로 임선동 이름 석 자에 어울리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때도 강속구 투수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듬해인 2001년 14승을 올리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했지만, 이후 잦은 부상에 신음하고 목표의식을 잃으면서 다시는 두 자리 승수에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면서 2006년을 끝으로 통산 52승36패, 평균자책점 4.50의 성적을 남긴 채 유니폼을 벗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임선동은 왜 고교 시절이나 연세대 시절 초기에 보여줬던 구속과 구위를 잃어버렸을까.
1997년 1군 투수코치로 변신한 정삼흠은 임선동에 대해 “입단할 때부터 몸이 돼 있지 않았다”면서 “이두박근이 약해 던지는 동작부터 잘못 돼 있었다. 공을 손목으로 꺾어 던졌다. 한번 던지고 나면 최소 5일을 쉬어야하는 습관도 있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앞서 설명한 대로 1998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 등판 후 4일간 휴식을 취한 뒤 5차전에 등판했지만 5차전에는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오히려 조기강판을 했다.
정삼흠은 이어 “구위는 생각보다 약했지만 대학 시절 고연전도 자주 경험하고 어릴 때부터 큰경기를 많이 치렀기 때문에 경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머리가 영리해 수싸움에도 능했다”고 임선동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연세대 시절과 LG 시절 포수로서 임선동 공을 많이 받아준 2년 후배 조인성(현 두산 배터리코치)은 이런 얘기를 했다.
“선동이 형은 고교 시절이나 대학 3학년 시절까지만 해도 공이 정말 좋았죠.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몸이 많이 불었고, 프로에서도 그랬어요. 제가 볼 땐 일본 다이에 입단이 무산되면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다친 뒤로는 구속이 크게 줄었어요. 그 이후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임선동은 현대 이적 후 2년째인 2000년 다승왕에 오르면서 전성기를 만드는가 했지만 너무 일찍 시들어버렸다.
그 과정을 함께하며 지도한 당시 김시진 투수코치(현 KBO 감독관)는 이렇게 기억했다.
“선동이는 기본적으로 공을 때리는 능력은 갖고 있었어요. 구속을 잃어버린 건 체중 문제인 것 같았어요. 1999년 일본 미야코지마 마무리훈련부터 살을 빼는 데 주력했죠. 당시 야구장에서 숙소까지 약 16㎞였는데 하프 거리(8㎞)를 하루 걸러 달렸어요. 나중엔 스스로 풀코스로 뛰겠다고 하더라고요. 이듬해 미국 플로리다 브래든턴에 가서 스프링캠프를 하면서도 살을 많이 뺐죠. 내 기억으로는 몸무게가 120㎏ 중반쯤 됐는데 이를 13㎏ 정도 줄였던 것 같아요. 본인도 굉장히 노력을 했죠. 그 결과 2000년 다승왕을 차지했어요. 하지만 그때도 구속이 아주 잘 나온 건 아니었어요.”

◆‘한국판’ 커트 플러드…‘풍운아’ 임선동이 남긴 것
임선동은 가진 재능에 비해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한 비운의 천재투수였다. 누군가는 세상의 모진 풍파와 우여곡절을 겪은 ‘풍운아’라고 했다. 한편에서는 자기관리를 하지 않은 ‘게으른 천재’로 비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에게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그를 향한 교차된 시선과는 별개로 어찌됐든 임선동 파동은 우리 야구계에 많은 화두를 던졌다.
무엇보다 KBO의 제도적인 모순들을 세상에 노출시킨 계기가 됐다. 선수를 한 번 지명하고 영입하면 영구적으로 보유권을 갖도록 만든 KBO 규약에 대해 손질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는 결국 1999년 프리에이전트(FA) 제도 도입의 트리거로 작용했다.
메이저리그에서 1970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외야수 커트 플러드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자 이를 거부하며 법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를 계기로 메이저리그에 FA 제도가 탄생했다. 임선동은 KBO리그의 FA 제도 탄생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한국판 커트 플러드’라고 볼 수도 있다.
신인 1차지명 선수에 대한 보유권 유효기간도 과거에는 영구적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점차 단축되기 시작했다.
또한 과거에는 선수의 드래프트 참가 의사와 상관없이 프로구단이 지명을 했지만, 오늘날에는 신인드래프트 신청자에 한해 프로 구단이 지명을 하게 된다.
여기서 가정법 하나. 만약 임선동이 1992년 LG에 1차지명된 뒤 연세대로 진학하지 않고 바로 LG에 입단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게 아니면 그가 휘문고 졸업 당시 박찬호와 조성민처럼 1차지명을 받지 않아 자유롭게 해외 무대로 진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가 임선동이기에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본다.
한편 임선동이 입단한 1997년에는 LG 내부에도 많은 변화의 물결이 일게 된다. 감독 교체뿐만 아니라 LG 역사를 뒤흔들 새로운 전력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새로운 트윈스 야구가 발진한다.
[엘팬알백] ㊽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