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 5대 몰다 파산한 매운 인생..고추 농사 정착해 억대 매출
고추 농부 김영환 맛나향고추작목회장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매운 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나름 과학적으로 일리 있는 일이다. 매운맛은 통각이다. 통증이 느껴지면 뇌에서는 고통을 달래기 위해 엔돌핀을 분비한다. 고통이 역설적으로 안정과 행복감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김영환 맛나향 고추작목회장(58)은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17년째 고추 농사를 짓고 있다. 기타 연주자, 덤프트럭 운전 사업을 거치며 인생의 매운맛을 봤다. 이젠 직접 매운맛을 만들고 있다는 김 회장을 만났다.
◇겨울에도 한결같은 매운맛
경남 밀양은 얼음골사과·깻잎·풋고추 등 다양한 농산물의 주산지다. 연 평균 기온이 12.9℃로 겨울철도 비교적 따뜻하고 눈·비가 적으면서 일조시간이 긴 편이다. 토질 역시 농산물 재배에 적합하다. 토양 물질이 물에 의해 운반·퇴적된 충적토로 유기물질이 풍부하고 매우 비옥하다.
그중에서도 밀양시 무안면은 풋고추를 주로 재배하는 지역이다. 무안이라는 이름은 ‘물안’이라는 말에서 왔다. 물이 많고 땅이 비옥해 약 300여년 전부터 고추를 재배했다. 무안 풋고추는 과피가 두꺼우면서도 매끈하고 부드럽다. 다른 지역은 노지에서 재배하지만 무안에서는 하우스에서 고추를 재배한다. 덕분에 겨울철에도 한결같이 매운맛을 유지한다.
신품종 개발도 활발하다. 매운맛은 전혀 없이 단맛이 강한 ‘미인 고추’, 과피가 두꺼워 저장성이 우수하면서도 수분이 가득한 ‘모닝 고추’ 등 맵지 않은 고추가 인기다. 특히 모닝 고추는 아침부터 먹어도 속이 편안할 정도로 순해 어린이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무안농협산지유통센터는 그 외에도 길이가 긴 롱그린 고추, 요리에 자주 쓰이는 꽈리고추 등 다양한 고추를 취급한다.
◇고추 만나 시작한 제2의 인생
김 회장은 경남 밀양 무안면의 4000평(약 1만3223㎡) 부지에서 17년째 고추 농사를 짓고 있다. 취미는 베이스 기타 연주다. 마을 행사가 있을 땐 공연도 한다. 한때는 기타 연주가 그의 직업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기타를 잡았습니다. 남들은 한량처럼 봤지만 전 목숨걸고 치열하게 연주했어요. 20대 중반엔 천안의 한 레스토랑에서 하루 4시간씩 연주하고 월급으로 180만원씩 받았습니다.” 음악이 곧 인생이었다. 해고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경영난으로 정리해고 바람이 불었는데 연주자가 해고 1순위였어요. 더 이상 고집만 부릴 순 없었습니다. 아내와 한 살배기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현실과 타협해야 할 때였죠. 마침 운전 면허 대형을 소지하고 있어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운전’을 택했습니다.”
24톤짜리 덤프트럭 운전대를 잡았다. “남들은 오전 7시에 나올 때 전 4시에 나왔어요. 보통 한 달에 700만원 정도 버는데 전 1000만원씩 벌었죠. 욕심이 생겼습니다. 개인사업자를 내고 한 대에 1억원 넘는 덤프트럭을 게속 늘려나갔어요. 그렇게 덤프트럭 5대가 됐습니다. 거의 빚이었죠. 그래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IMF 사태로 한순간에 부도를 맞았습니다. 정말이지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죠.”
고추 농사를 짓던 고향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자기가 쓰던 양수기 등 장비를 가져다주면서 농사를 지어보라더군요. 땅은 절대 배신 안 한다면서요. 수중에 남은 돈 350만원으로 300~350평짜리 밭을 매입했습니다. 시설을 지을 돈이 없어서 헌 자재를 가져다가 직접 지었어요. 골조를 세우고 비닐을 씌웠죠. 그렇게 고추 농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겨울이 좋은 무안 풋고추
김 회장의 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안경에 김이 서렸다. 한겨울에도 풋고추 하우스의 최저기온은 18℃를 내려가지 않는다. 고추는 본래 중부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고온성 작물이기 때문이다. 강원도·경상북도 지역에서는 봄·여름, 길게는 가을까지 고추를 재배한다. 반면 경남 밀양의 무안 고추는 하우스 안에서 가을·겨울을 나고 11월부터 수확한다.
- 풋고추 재배 과정이 궁금합니다.
“9월 중순에 모종을 밭에 심습니다. 모종은 한 포기에 1700~1800원 정도 해요. 심은 지 40~50일이 지나면 1차 유인을 합니다. 고춧대를 옆줄에 묶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죠. 2차 유인을 할 땐 빛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위로 세워줍니다. 심은 지 60일 이후부터 열흘에 한 번씩 풋고추를 수확합니다. 이듬해 6월까지 부지런히 따야 해요.”
- 물을 많이 주면 덜 매운 고추가 되나요.
“요리사마다 레시피가 있듯이 농부들도 저마다 물·비료를 주는 레시피가 있습니다. 우리 밭은 배수가 잘되는 편이라 3일에 한 번 20분 정도 물을 뿌리고 있어요. 하루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주는 집도 있습니다. 수분량이 적으면 매운 고추가 되긴 하는데요. 물 만큼이나 햇볕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햇볕을 많이 본 고추가 맵죠. 같은 땅에서 같은 양의 물을 주더라도 겨울에 나오는 고추가 덜 맵고 봄 고추가 더 매워요.”
- 농사일에 익숙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겠어요.
“처음엔 사고도 많이 쳤죠. 가지를 재배하는 농가에서 호르몬제를 뿌리더군요. 벌 없이도 수정이 잘 된다는 말에 혹해서 고추밭에 뿌렸는데요. 일주일이 지나자 잎이 꼬부랑하게 변했습니다. 고추밭에는 절대 치면 안 되는 약인 줄도 모르고 투철한 실험정신을 발휘한거죠. 다행히 20일 정도 그대로 놔두니 새순이 다시 자랐어요. 고춧잎을 파마시킨 사람은 전국에 저 하나뿐일 겁니다.”
- 평소엔 수정을 어떻게 시키나요.
“하우스 안에 호박벌을 풀어두면 수정이 됩니다. 그 벌에 참 많이도 쏘였죠. 땀 흘려 키운 풋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이 농부의 눈엔 정말 예쁘거든요. 술 한잔 걸치고 나면 그 모습을 보려고 하우스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벌이 절 쏘더군요. 알고 보니 벌이 단내를 좋아해서 술 냄새를 맡고 모여든 거였죠. 이젠 절대 술 먹고 하우스에 안 들어갑니다.”
- 요즘은 어떤 일을 가장 많이 하나요.
“11월 이후부터는 수확 작업으로 제일 바쁩니다. 농부들 사이에서는 ‘약이 올랐다’고 표현하는데요. 풋고추가 수확할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는 뜻이죠. 통통하고 진한 초록빛을 띤 고추가 약이 오른 고추예요. 고추를 딸 때는 꼭지를 잡고 아래로 당기면 안 됩니다. 잘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나무가 다칠 수 있기 때문이죠. 꼭지 끄트머리를 잡고 위로 젖히듯이 올려서 따야 합니다. 한 명이 하루 종일 따면 80~120㎏ 정도를 수확할 수 있어요.”
◇아무리 좋은 풋고추라도 수출은 일본만
밀양 무안 고추 농부가 수확한 고추는 모두 무안농협산지유통센터(이하 무안APC)로 모인다. 무안APC는 전체 약 5000평(약 1만 6528㎡) 규모로, 경매장·공동선별장·소포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있다. 하루 처리 물량은 10㎏ 단위의 박스를 기준으로 1000~5000박스에 달한다. 고추로만 연간 150억원의 매출을 내고 있다. 최정삼 차장(51)에게 무안의 풋고추가 전국으로 유통되는 과정을 들었다.
- 풋고추의 양·상태를 어떻게 확인하나요.
“농가에서 자루에 담은 풋고추를 트럭에 실어 오는데요. 먼저 트럭째로 무게를 잽니다. 풋고추를 트럭에서 내린 다음 트럭의 무게를 다시 재고 그 차이 값으로 고추의 무게를 확인하죠. 선별장은 총 7개 라인이 있습니다. 한 라인에 작업자들이 두 줄씩 나눠서서 고추를 선별하는데요. 흠집이 나거나 붉은빛이 돌기 시작한 고추, 꼭지가 빠지고 끝이 갈라진 고추는 제외합니다. 이런 선별·포장 작업은 모두 GAP(우수농산물관리제도) 인증을 받은 시설에서 이뤄집니다.”
- 선별·포장한 풋고추는 어디로 가나요.
“무안 풋고추는 수확 후 익일 출하를 원칙으로 합니다. 물량이 많을 땐 저녁 10시가 넘도록 선별 작업을 해야합니다. 포장까지 마친 풋고추는 농협 하나로마트를 비롯해 대형마트, 식자재마트 등으로 나갑니다. 한 해 평균 5억~10억원 정도는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어요. 풋고추는 며칠만 시간이 지나면 홍고추로 변하거나 꼭지가 변색되기 때문에 먼 나라로는 수출하기 어렵습니다.”
- 맛있는 고추 고르는 법이 있다면요.
“표면이 반질반질 윤기가 돌고 단단한 고추가 좋습니다. 취향에 따라 품종을 달리할 수 있는데요. 매운맛을 좋아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청양고추가 제일이죠. 매운 음식은 잘 먹지 못하는데 고추 향은 좋아하는 경우엔 모닝고추를 추천합니다. 아이들이 먹어도 될 정도로 달달하거든요. 무엇보다 무안 풋고추를 상징하는 ‘맛나향’이라는 로고가 있다면 신뢰해도 됩니다.”
◇매운 고추 못 먹는 고추 농부
고추의 매운맛 앞엔 장사 없다. ‘고추를 따서 바로 먹어도 된다’던 김 회장도 한입 베어 물더니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곧이어 켁켁거리며 기침을 했다.
매운 고추를 잘 먹진 못해도 누구보다 고추에 대한 애정이 깊다. 어릴 적부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씨를 좋아했지만 농부가 된 이후부턴 반대가 됐다. 비 오면 작업이 힘들고 눈이 많이 내리면 하우스가 내려앉을까 겁부터 난다.
- 풋고추 농사는 벌이도 넉넉한가요.
“보통 10㎏ 단위로 가격을 책정하는데요. 그때그때 단가가 달라집니다. 작년엔 평균 단가가 7만원 정도였어요. 매출은 1억원이 넘었죠. 하지만 그중 70%가 비용으로 나갑니다. 대부분이 전기료·인건비·약제비죠. 특히 작년 하반기에 농업용 전기요금이 한번에 40~50% 올랐습니다. 고지서보고 뒷목 잡은 농가들 많을 거예요. 한겨울엔 700평짜리 하우스 한 동 난방비로만 300만원이 나옵니다. 한 달에 전기요금만 1500만원을 내고 있죠. 올해 고춧값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겠네요.”
- 고추 맛있게 먹는 법 하나만 소개한다면요.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고추나 마늘을 곁들여 먹죠. 그때 고추를 같이 구워 먹어보세요. 별미입니다. 탈 정도로 많이 구우면 안 돼요. 통으로 올린 다음 황색이 살짝 돌 때 가위로 잘라 먹으면 매운맛은 좀 덜하고 고소한 맛이 올라옵니다.”
- 농사는 언제까지 지을 계획인가요.
“처음 농사를 지을 땐 ‘환갑까지만 하자’고 생각했는데요. 지금 생각으로는 일흔까지 하고 싶습니다. 농사가 절대 만만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처음 시작할 때 마음 그대롭니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 해 한 해 고추를 재배하고 있어요. 덕분에 아들·딸 공부도 시키고 손주도 봤습니다. 다른 작물로 넘어갈 생각도 없어요. 남은 생은 고추랑 평생 가야죠.”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