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좋은 중고차' 신세로 전락한 기아의 가장 비싼 세단
1차 부분 변경이 이루어진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같은 해 12월, 꽤나 큰 폭의 디자인 변화를 이룬 페이스 리프트 모델, '더 뉴 K9'이 출시됐습니다. 기존 줄무늬 패턴 그릴을 메쉬 타입으로 변경해 BMW 이미지를 걷어낸 것과 3가지 알루미 늄 휠을 모두 변경한 것이 눈길을 끌었는데, 개인적으로 크롬 휠은 좀 부담스럽고 외려 하위 트림 휠이 더 멋스럽더라구요.
특히 뒷모습이 확 달라졌습니다. 매립형 머플러팁과 리어램프의 사이즈를 키워 더욱 넓고 묵직한 인상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직 전 모델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고급차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어요. 리어램프의 내부 그래픽은 '더 뉴 쏘렌토', '더 뉴 카니발' 등과 통일감을 주기도 했죠. 또 이 시기 우버 블랙과 카카오 블랙 등 다양한 고급 택시 서비스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영업용 번호판을 단 K9이 도로 위에 심심치 않게 보이기도 했죠. 다만 출시 초 논란이 됐던 부분은 주로 앞모습이었는데, 딱히 문제가 없었던 뒷모습에 변화가 집중됐다는 건 좀 의아한 지점이었어요.
실내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이전에 배척하던 우드그레인을 폭넓게 사용했고 부담스러운 화이트와 무난의 극치 블랙, 두 가지 밖에 없어 사실상 선택지가 하나였던 내장 색상의 새로운 브라운, 후기형에는 베이지 컬러를 추가해 선택의 폭을 넓혔습니다. 최상위 트림에는 퀼팅 시트를 더해 남다른 느낌을 주기도 했죠.
파워트레인은 기존의 V6 GDi 파워트레인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드디어 8기통 퀀텀을 추가해 명예회복에 나섰습니다. 엔진룸을 가득 채우는 V8 5.0L 타우 GDi 엔진과 이를 알리는 전용 레터링을 적용했고, 엔진 무게 또한 상당했기 때문에 공차 중량만 2톤이 훌쩍 넘는 거구가 됐지만, 최고 출력 425마력, 52kgf.m의 넉넉한 파워를 선사해 6기통 모델과는 결을 달리하는 여유로운 주행 감각을 제공했죠. 당연하게도 연비는 연료통에 구멍이 난 수준이었지만요.
프리미엄 수입차 부럽지 않은 정숙성은 여전했고 직전 모델의 단단한 승차감이 주 고객층의 성향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수용해 서스펜션을 보다 부드럽게 세팅하면서 더 안락해졌습니다. 자동긴급제동 같은 안전사양이 추가된 것은 좋았는데, 아쉽게도 차선이탈 방지 보조 같은 더 높은 수준의 'ADAS'가 단종될 때까지 추가되지 않은 건 이 '더 뉴 K9'의 경쟁력을 떨어뜨린 부분이었습니다. 전자식 스티어링 'MDPS'가 아닌 전기유압식 스티어링을 사용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넣을 수가 없었죠.
1세대 K9은 분명 에쿠스와 제네시스에 결코 밀리지 않는 호화로운 럭셔리 세단이었습니다. 출시 초 8기통을 품지는 못했지만, 현대기아차를 통틀어 가장 최신의 장비로 무장했고 후륜 구동까지 갖추면서 증여 받은 플래그십 오피러스의 느낌을 말끔하게 지워냈죠. 비로소 새로운 기아를 대표할 만한 모델로 거듭났지만, 정작 기아를 대표하는 분들만 탔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당시 오너들을 대상으로 문화공연을 개최하고 최신 갤럭시탭을 증정하는 등 프리미엄 마케팅에 힘썼고, 출시 전 사전 계약만 3,500여 대에 달해 순조롭게 출발하는 듯 했으나 출시 이듬해부터 판매량이 큰 폭으로 하락해 반 체급 낮은 제네시스는 물론 에쿠스 판매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서둘러 진행된 페이스리프트로 디자인 이슈를 수습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긴 했지만 분위기를 반전시킬 만큼 임팩트를 주진 못했고, 이 와중에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된 신형 제네시스 G80이 등장해 남아있던 관심마저 빼앗겨 버렸죠.
기존에 없던 새로운 대형 세단이라는 신선함과 합리적인 가격은 얼리 어댑터 성향이 강한 소비자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애초에 합리적인 가격이 중요하지 않은 세그먼트였기 때문에 브랜드 밸류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소비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했습니다. 기존에 국산 준대형 차를 타던 소비자들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구성이었지만, 프리미엄 수입차를 염두에 두고 있는 고객들을 끌어들이기에는 디테일도 부족했어요.
앞서 오피러스에서 주구장창 느꼈던 고급차가 아닌 단순한 고가차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죠. 최소한 독자 엠블럼이라도 달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맴도는데, 오피러스나 모하비가 기아차 내에서 나름 고급차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전용 엠블럼의 역할이 꽤나 크게 작용했으니까요.
집안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해외 시장에서는 처음부터 V8 엔진 라인업까지 튼실하게 갖추고 나갔지만, 해외라고 사람 사는 게 뭐 다를까요? 그들에게도 기아 로고를 딴 럭셔리 세단은 모순적으로 느껴졌고, 판매량은 처참했습니다. 굵직한 폭스바겐도 실패한 마당에 기아가 잘 될 리가 없었죠.
참고로 지역에 따라 기아 '큐오리스', 이후 'K900'라는 근본 없는 이름으로 바꿔 판매했는데, 경찰견이나 군견을 K9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연상되는 이미지가 좋지 않아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하죠. 현지의 문화나 어감, 특정 단어와의 혼동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수출명이 달라지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입니다. 심지어 북미에서 기아는 전투 중 사망, 즉 전사를 의미하는 'Killed in Action'으로 놀림을 받고 있던 터라 기아 K9을 그대로 밀기에는 언뜻 봐도 골치 아팠을 것 같아요.
하지만 비인기 모델들이 으레 그렇듯 가성비 좋은 중고차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무리 국산차라고는 해도 고급 부품을 잔뜩 사용한 만큼 정비비가 만만하진 않았지만, 동급 수입차에 비하면 여전히 합리적인 가격에 유지할 수 있었고 대형차라면 피해갈 수 없는 큰 폭의 감가 덕분에 중고 구매 시 만족도가 상당했죠. 엔진의 알루미늄 헤드를 고정하는 나사가 파손되어 냉각수나 엔진 오일이 새는, 일명 '헤드 볼트 누유' 같은 고질병이 드러났는데, 플래그쉽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지 다행히 10년 20만km로 보증이 연장됐다고 하니 중고차 구매하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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