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중독재,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인가
[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네오포퓰리즘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모처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이 환히 웃으며 군인들과 함께 나치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대단했다. [AP=연합뉴스]](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17/joongangsunday/20250317154122795puwl.jpg)
대중독재의 문제의식은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다수가 독재를 지지하면, 그것은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 미국 민주주의를 ‘대중의 전제정’이라고 일갈한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 민주주의의 사상적 기둥인 ‘인민주권론’에서 파시즘의 이론적 뿌리를 찾은 조지 모스,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인 자코뱅주의를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고 규정한 야콥 탈몬 등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질문이다.
모스와 탈몬은 각각 독일과 폴란드 출신 유대계 학자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과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한 학자였다.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지적했다고 해서 이들이 나치즘을 옹호했을 리는 만무하다. 미국의 트럼프 신드롬을 보니 1933년 히틀러와 나치 당이 어떻게 선거에서 승리했는지 이해된다는 이스라엘 진보 일간지 ‘하레츠’의 논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다수가 소수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대중독재는 오늘날의 동유럽에서는 더 흔하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일으켜 인기가 치솟는 러시아의 푸틴,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로 연이어 선거에서 승리한 헝가리의 오르반, 교권적 파시즘에 가까운 폴란드 카친스키 등이 누리는 대중적 인기도 트럼프 신드롬과 유사하다. 트럼프 1기 정권의 이데올로그였던 스티브 배넌은 동유럽의 극우파 집회에서 단골 초청 연사였다.
유럽 노동자까지 극우 포퓰리즘 지지
서유럽에서도 대중독재의 전조는 여기저기 보인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작센 등의 독일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극우 정당의 약진 때문에 독일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연정 구성이 쉽지 않아, 국가 예산마저 불투명한 상태다. 지난 12월 초 영국의 여론조사에서 극우적 성향의 네오 포퓰리즘 정당인 ‘영국 개혁(Reform UK)’의 지지율이 집권 노동당을 1%포인트 앞선 24%를 기록한 것은 더 충격적이다. 영미식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한 셈이다.
익히 알려진 마리 르펜의 프랑스 ‘인민전선’이나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벨기에의 플레미쉬 블록, 스위스의 인민당, 이탈리아의 북부 동맹 등에 이어 네덜란드의 극우 자유당의 정치적 약진은 이제 상수다. 복지국가의 이상적 모델 스칸디나비아의 정치 상황도 우울하다. 반이민 정서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스웨덴 민주당,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진정한 핀란드인’, 극우 정당에 가까운 덴마크 인민당과 노르웨이 진보당의 약진을 보면, 그야말로 전 세계가 1930년대 파시즘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하다.
유럽의 노동자들이 전통적인 좌파 정당 대신 이들 우익 정당들에 투표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탈냉전 시대 유럽의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은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정당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실업보험, 연금제도, 의료보험, 8시간 노동일, 집회와 결사의 자유, 아동 노동 금지, 출산휴가 등 지난 세기 노동운동의 주요 요구사항을 당 강령으로 뚜렷이 명시하고 있다. 이들에 비하면, 19세기적 자유주의를 못 벗어난 국민의힘은 보수정당이라고 이름붙이기도 민망 한 수준이다.
1930년대 유럽의 파시즘과 21세기 글로벌 트럼프주의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밑으로부터의 지지에 있다. 1933년 3월 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의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히틀러는 ‘독일 주민 대다수로부터 괄목할 만한 정도의 인기’와 ‘대중적 지지기반’을 누렸다. ‘독일 소녀단’의 열렬 단원들 사이에서 히틀러가 누렸던 인기는 아이돌 가수 뺨치는 수준이었다. 나치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지난 14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플로리다 별장 근처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 [AFP=연합뉴스]](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17/joongangsunday/20250317154124616bhkw.jpg)
‘산업전사’로 동원되어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은 남한의 노동자들이 박정희 개발 독재에 보낸 일정한 지지도 다르지 않다. 재계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생활급 체계’를 도입하고,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공공영역으로 여성을 ‘총후부인’으로 초청한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는 10월 유신체제의 역사 교과서였다.
‘아래로부터의 독재’라는 관점에서 보면, 독재와 민주주의의 거리는 생각만큼 멀지 않다. 개념의 역사에서 독재의 반대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상상태’이다. 개념사 연구에 따르면, 독재의 기원은 고대 로마공화정의 임시 직책인 ‘독재관’에 있다. 전쟁과 자연재해나, 역병의 창궐 같은 ‘비상사태’에 빠졌을 때, 공화정은 원로원의 추천에 따라 독재관을 임명해 국가의 전권을 일임했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모의해 대국민 경고용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없다는 게 ‘독재관’의 제도적 취지였다.
독재관은 비상사태가 해소되면 즉시 자리에서 내려왔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갖는 위험성 때문에, 그 임기는 6개월을 넘지 못했다. 임기 중에도 독재관은 원로원의 감독과 통제를 받았으며, 독재관의 잘못은 ‘통치행위’라고 면죄부를 받는 게 아니라 임기가 끝나면 기소될 수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정치권의 권력에 대한 이해가 2000년 전의 로마공화정보다 나은지 모르겠다.
기원전 501년부터 302년까지 300년 동안 로마공화정은 총 85명의 독재관을 임명했다. 평균 3년 반마다 1명씩 있었던 셈인데, 그래도 공화정이 굳건했던 것은 독재관이 비상사태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제도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으로 셀프 임명된 후, 공화정의 수호자 독재관은 황제의 권력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자주 쓰는 ‘독재’로 뜻이 바뀌었다.
독재가 역사의 공론장에 다시 등장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격동기의 일이다. 자코뱅 공포정치의 주역 베트랑 바레르는 1793년 국민공회의 연설에서 국민이 자기 자신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는 자코뱅 독재는 정당하다고 강변했다. 최고 주권자인 국민의 뜻이 그렇다면 독재도 민주주의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코뱅의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는 대중독재의 문을 열었다.
12·3 비상계엄, 국민주권 부정하는 발상
90% 이상의 투표율과 찬성표로 유신헌법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1972년 11월 21일의 국민투표와 다시 국민 70% 이상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의 국민적 정당성을 확보한 박정희 정권도 국민의 이름으로 유신체제를 정당화했다. 나치즘을 국민주권의 명분으로 정당화한 칼 슈미트의 ‘주권독재’ 이론을 빌려 왔다. 이에 비하면, 12·3 비상계엄은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시대착오적 전제정의 발상일 뿐이다. 창피하지만, 무서울 건 없다.
대중독재의 관점에서 볼 때, 우려되는 것은 탄핵 이후이다. 자코뱅의 공포정치와 독재는 국민의 뜻에 따른 것이기에 독재가 아니라는 논리가 탄핵 이후 한국의 정치판과 공론장을 삼킬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기 때문에 입법부는 임명된 권력인 사법부와 행정부보다 우위에 있다는 발상이나 청와대 ‘국민청원제’처럼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국민이 직접 주요 사안들을 의제화하고 결정해도 좋다는 발상은 권력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는 삼권분립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국민의 이름으로 부정한다. 결정적인 국면마다 국민의 뜻을 직접 묻는 ‘국민투표 민주주의’를 지렛대로 유신독재로 나아간 박정희의 정치적 후예는 시대착오적 전제정을 꿈꾸는 주술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류를 자처하는 국민팔이 정치가들이다. 독재는 민주주의의 저편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다.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민주화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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