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벗어난 '미스터리한 세계'로 가는 안내서
예전에 여행지에서 읽기 좋은 책은 무엇인가를 두고 독서모임 회원들과 수다를 떤 적 있다. 애초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읽는 모임이었으니 정답은 당연히도 미스터리 소설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여행지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무엇이냐는 식의 수다가 이어졌다.
짧은 일정을 쪼개 가야 할 곳의 동선을 명확히 짜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기 바쁜 것이 흔한 우리의 여행 방식이지만, 요즘은 'OO에서 한 달 살기' 류의 경험담을 쉽게 들을 수 있으니만큼, 한가롭게 경치 좋은 곳에서 책과 게으름을 벗삼는 여행도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미스터리는 바로 그런 시간을 위한 맞춤 이야기다. 안온한 우리 삶에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기믹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법칙이 작동하는 구조화한 세계의 만화 같은 사건 전개. 미스터리는 일상과 떨어져 여유를 즐기는 시간에 비일상적인 사건을 덧칠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너는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김희선 지음, 민음사)는 소설가 김희선이 직접 골라 뽑은 18권의 미스터리를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 내용은 어떻고~' 식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 책에 얽힌 핵심적 테마만을 뽑아낸 후 그 골격을 소설가의 유려한 다른 이야기로 덧칠한 안내서다.
책에 소개된 작가는 영미 유럽권과 일본을 가리지 않는다. '미스터리' 하면 떠오를 이름인 스티븐 킹의 작품부터 최근 본격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화제가 된 유키 하루오의 작품까지 균형잡힌 선별이 이뤄졌다. 이런 장르 소개형 책은 보통 클래식이라 부를 만한 작품들, 즉 애거서 크리스티나 코넌 도일로 대표되는 백여년 전 작품에 힘을 싣고 최근의 경향은 곁가지처럼 붙이고 마는 게 보통인데, 김희선 작가는 비교적 최근 작품을 많이 소개했다.
유키 하루오의 <방주>를 비롯해 여성 버디무비와 종말에 살인사건을 혼합한 <세상 끝의 살인>, 최근 잘 나가는 작가 피터 스완슨의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과 같은 책은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비록 장르별 선호는 있겠으나) 대체로 주변에 소개해도 괜찮을 법한 좋은 작품들이다.
작가가 책의 테마를 소개하며 함께 풀어놓는 이야기의 넓이와 관심 세계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소개된 책 이야기 못잖게 함께 펼쳐진 작가의 '입담(?)'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너는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는, 정확히는 '미스터리에 큰 흥미는 없지만 책을 좋아하는 독서 마니아'를 대상으로 한 소개서로 보인다. 김희선 작가의 위트 넘치는 이야기가 그렇고, 소개된 작품들이 그런데, 평소 활자 읽기의 즐거움과 거리가 있던 이들이 '미스터리 소설' 입문용으로 이 책을 소화하기는 쉽잖아 보인다.
더 일반적인 입문서로 조금 예전에 나온 <미스터리 가이드북>(윤영천 지음, 한스미디어)이 있다. 미스터리 팬들의 사이트인 '하우미스터리'를 20년 넘게 운영 중인 미스터리 애호가이자 기획자인 저자가 그야말로 '미스터리'라는 세계 자체의 입구부터 소개하는 안내서다. 예컨대 '미스터리와 스릴러는 다른가' '미스터리의 출발점은 어디인가'와 같은, 조금은 '위키백과'스러운 분류로 독자에게 미스터리의 세계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너는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는 딱히 읽는 순서가 관계 없는 책이다. 소개된 이야기 중 독자가 마음에 드는 부분부터 읽으면 된다. <미스터리 가이드북>에는 하이라이트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정도는 자주 접한 독자라면 책의 두 번째 파트 '서브 장르' 부분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하드보일드, 경찰소설, 코지 미스터리, 스파이 소설, 노르딕 누아르 등 통상 '미스터리'라 부르는 장르에서도 전문화한 각 장르를 소개한 부분인데, 필자가 추천하는 책들이 선정돼 있다. 추천된 책들만 골라 읽어도 해당 장르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
특히 본격 미스터리는 독자와 작가의 게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공정한 게임의 법칙' 안에서 범인을 맞출 수 있는 힌트를 주고, 독자는 책을 읽으며 논리적으로 범인을 잡아내는 방식이다. 엘러리 퀸 등 이 분야 거장으로 대표된 이 같은 놀이적 접근은 최근 들어서도 유난히 일본에서 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신본격 미스터리 장르, 특수설정 미스터리류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고 보면, 애초 미스터리는 독서라는 방법을 활용한 작가와 독자의 놀이였다고 볼 수 있다. 롤플레잉 게임으로 우리는 일상을 벗어나 중세 유럽풍 판타지 세계의 전사가 될 수 있다. 미스터리의 핵심 역시 다르지 않은 듯하다. 롤플레잉 장르에도 '던전 앤드 드래곤' 식의 복잡한 법칙이 있듯, 미스터리의 세계에도 대체로 각 장르별 핵심적 법칙과 테마가 있다. 다만, 미스터리를 즐기는 데 이런 법칙을 알 필요는 없다. 독자는 그저 작가가 설정한 기막힌 범죄 세계로 빠져들어 숨막히는 범인과 탐정의 대결을 즐기면 그만이다. 긴 추석 연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미스터리와 함께 하면 어떨까.
[이대희 기자(ed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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