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쌓았다고요?" 태풍 '매미'의 악몽, 연간 58만 명 찾는 매미성으로
2003년 태풍 '매미'로 경작지 잃은 백순삼씨
혼자 맨손으로 21년간 돌 2만 장 쌓아
"힘들 때 매미성 통해 용기 얻었으면"
“우와, 이걸 정말 한 사람이 맨손으로 만들었다고?”
지난 6일 오후 경남 거제시 장목면 복항마을. 몽돌해변을 따라 구불구불 쌓인 성벽, 그 성벽을 층층이 둘러싼 향나무, 절경이다 싶은 곳마다 기가 막히게 자리 잡은 망루에 깜찍한 연못까지. 중세시대 유럽에서나 볼 법한 성곽을 마주한 관광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탄성을 쏟아냈다. 높이 12m, 둘레 120m 규모 성벽 앞 안내판에는 ‘매미성. 2003년 태풍 매미로 경작지를 잃은 시민 백순삼씨가 자연재해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홀로 쌓아 올린 벽’이라고 쓰여 있었다. 태풍 피해를 막기 위해 60kg에 달하는 화강암 2만여 개를 20년 넘게 하나하나 손으로 쌓아 올려 만든 성이라니, 탄생비화를 알고 봐도 놀라움 그 자체였다. 서울에서 온 오준엽(30)씨는 “긴 세월 어떤 마음으로 이 성을 쌓았을지, 그 마음이 공간 전체에 녹아 있는 것 같다”며 “존경심을 넘어 경외감이 들 정도”라고 감탄했다.
2003년 9월 12일,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불어닥친 태풍 매미로 경남에서만 63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전국적으로는 132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됐고, 재산 피해는 4조7,800억 원에 달했다. 매미성 '성주' 백순삼(70)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퇴 후 집을 짓고 텃밭을 가꿀 요량으로 매입한 부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백씨는 “철탑이 무너지고 커다란 배도 다 뒤집혀 동네 전체가 쑥대밭이 됐었다”며 “퇴직금까지 중간 정산해서 산 땅인데 눈앞이 깜깜하더라”고 회상했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고 응급복구가 시작됐지만 백씨 몫으로 돌아오는 건 없었다. 워낙 다른 곳에 피해가 커 실주거지가 아닌 곳은 지원이 어렵다고 했다. 사비로 공사를 진행하려니 열악한 도로 탓에 배보다 배꼽이 컸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그해 11월 망치, 정, 흙칼, 못 쓰는 프라이팬만 챙겨 직접 복구에 나섰다. 건재상에서 30~60㎏짜리 화강석을 차가 이동할 수 있는 거리까지 배달해주면 퇴근 후나 주말 등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씩 들어 날랐다.
처음에는 그저 튼튼한 축대를 쌓는 게 목적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조선소 선박 설계 연구원이었던 본업을 살려 성 중앙은 뱃머리롤 본뜨고, 전면은 허리 부분을 잘록하게 곡선으로 디자인했다. 심미성, 기능성을 모두 염두에 둔 계산이었지만 그렇다고 설계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백씨는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흙 자국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며 “파도와 바람의 방향을 읽고 그 흔적대로 쌓아 만든, 이른바 자연이 설계한 성”이라고 말했다. 덕분인지 매미성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태풍 피해를 입지 않았다.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출 무렵 한국의 가우디(1852~1926, 스페인 천재 건축가)가 지은 성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난해에는 58만여 명이 다녀갔다. 20여 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에 맛집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고향을 떠났던 이들도 돌아왔다. 5년 전 김해에서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정리하고 매미성 길목에 카페를 연 서영미(56)씨는 “부모님도 모실 겸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도 늘 일자리가 문제였는데, 매미성 덕분에 다 해결됐다”며 “주민들도 관광객들에게 직접 수확한 농작물을 파는 등 스스로 용돈 정도는 벌수 있게 돼 마을에 활기가 돈다”고 고마워했다.
이만하면 본전 생각이 날 법도 하지만 정작 백씨가 매미성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없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데다 다른 수익 사업도 전혀 하지 않고 있어서다. 다만 10년 전 조선소 퇴직 후 고정 수입이 끊기면서 최근에는 아들과 카페를 준비하고 있다. 백씨는 “내가 지었어도 모두의 것”이라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매미성을 보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어간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매미성 축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거제= 박은경 기자 chang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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