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부유한 외국인에게 영주권 및 시민권 취득의 길을 열어주는 '골드 카드' 비자를 500만달러(약 70억 원)에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그 대상은)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많은 돈을 쓸 것이고, 세금도 많이 낼 것이며, 일자리도 많이 창출할 것이다. 우리는 이 제도가 매우 성공적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이번 '골드 카드' 비자가 현행 투자 이민 비자(EB-5) 제도를 대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내용은?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새 비자 소지자의 일자리 창출 요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돈 있는 사람들이 (그 대상)일 것"이라고만 언급했다.
현행 EB-5 비자는 발급 횟수가 제한되어 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 정부가 적자를 줄이기 위해 '골드 카드' 1000만 개를 판매할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대단한 일일 것이다. 환상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람들, 특히 부유하거나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 시민권 취득의 길이 되어 줄 것"이라면서 "부유하거나 재능 있는 사람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오는 것이다. 사람들을 데려오고 장기적으로 이 나라에 머무르게 하고자 기업들이 돈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유한 러시아인도 자격이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렇다, 아마도 그렇다. 나는 아주 좋은 러시아 올리가르히(재벌 기업가)들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러트닉 장관은 모든 비자 지원자는 "훌륭한, 세계적 수준의 세계 시민인지" 확인하는 철저한 심사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골드 카드' 비자를 발급받은 뒤 시민권을 받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EB-5 소지자 등 현행 미 영주권 소지자들은 일반적으로 5년 동안 미국에서 합법적인 영주권자로 거주해야 시민권을 신청할 자격이 된다.
미국 시민권 자격은 의회가 결정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 '골드 카드'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은 2주 후 발표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현행 투자 이민 비자(EB-5)를 대체하는 이유는?
러트닉 장관은 "EB-5 비자 프로그램은 …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 엉터리로 가득했다"면서 "낮은 비용으로 그린카드(영주권)를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EB-5 프로그램을 유지하기보다는 폐지하겠다고 결정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EB-5 제도는 지난 1990년 미 의회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자 도입한 제도로, 최소 1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에 약 100만달러를 투자한 개인은 발급 자격을 충족한다.
EB-5 비자 프로그램에 따라 투자자들은 투자의 대가로 즉시 그린카드(최종적으로 시민권 취득으로 가는 길이다)를 발급받게 된다. 반면 대부분 그린카드 신청자들은 몇 달에서 몇 년까지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EB-5 비자 발급 수는 연간 1만 개로 제한되어 있으며, 그중 3000개는 실업률이 높은 지역의 투자자들에게 할당된다. 미 이민국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외국인 투자자의 일자리 창출 및 자본 투자를 통한 미국 경제의 활성화"이다.
미 국토안보부가 가장 최근 발표한 '이민 통계 연감'에 따르면 2022년 9월 30일까지의 12개월간 EB-5 비자를 취득한 사람은 약 8000명이다.
아울러 지난 2021년, '미국 의회조사국'은 EB-5 비자 프로그램에는 다른 이민 비자에 비해 "추가적인 사기 발생 위험이 존재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해당 보고서는 "이러한 위험은 투자자의 자금이 합법적으로 확보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 비자가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점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결국 개인이 투자자들을 이용하도록 부추길 수 있으며 비자 발급이 특혜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국가의 유사한 비자 제도는?
사실 이와 비슷한 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존재한다.
이른바 '골드 비자'는 부유한 외국인에게 거액을 투자하는 대가로 거주하고 취업할 권리를 부여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부 카리브해 국가에서는 인기 있는 '골드 여권' 제도도 운영 중이다. 이를 취득한 부유한 외국인은 해당 국가에서 취업 및 선거권은 물론 시민으로서 누리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투자 이민 자문 업체인 '헨리 앤 파트너스'는 미국, 영국, 스페인, 그리스, 몰타, 호주, 캐나다, 이탈리아 등 부유한 개인에게 '황금 비자'를 발급하는 국개는 약 100여개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은 점점 더 많은 비판과 감시에 직면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3년 보고서는 "(이러한 황금 비자 및 여권 제도는) 외국인 직접 투자를 통한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지만, 법망을 피하고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범죄 수익금을 세탁하려는 범죄자와 부패 관리들에게도 매력적"이라고 지적한다.
100여개국에서 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는 글로벌 비정부기구인 '국제 투명성 기구'는 특히 EU 내 이 같은 제도는 "진정한 투자나 이민이 아닌 부패한 이익을 돕는다"고 경고한 바 있다.
다양한 EU 기관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2년 유럽의회의 '시민 자유, 법무 및 내무 위원회'는 황금 여권 금지에 표를 던졌으며, 무비자로 EU에 입국할 수 있는 제3국에 황금 여권 제도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우려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스 등 여러 유럽 국가가 황금 비자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은 지난 2013년 50만 유로(약 7억원) 이상의 부동산을 구입하는 투자자에게 자국 비자를 발급하는 '황금 비자' 프로그램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4월 3일이 해당 비자의 마지막 신청 마감일이다.
지난해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정부는 "주택이 단순한 사업 투기 대상이 아닌 권리임을 보장하고자" 해당 비자 프로그램을 종료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EU 황금 비자에 대한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와 미국 하버드대학의 연구 또한 이 제도를 운영하는 경제적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며, 외국인 투자 중 "극소수의" 비율을 차지해 그 경제적 영향이 "미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글로벌 탐사보도 언론인 네트워크인 '조직범죄 및 부패 신고 프로젝트(OCCRP)'의 2023년 10월 조사 보고서를 통해 전쟁범죄 혐의를 받는 전 리비아 대령과 자국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튀르키예 사업가가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도미니카공화국 여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