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하노이'..호안끼엠 호수와 에그 커피[이환주의 내돈내산]
"유럽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일본에 가서 맛있는 라멘을 먹고 '아 좋은 경험이야' (라고 하는데) 그건 경험이 아니에요. 그냥 놀러 간 거지. 경험은요. 피땀 흘려서 노력해서 얻는 게 경험이에요."
위 문장은 최근 본 유튜브 숏츠에서 방송인 박명수씨가 한 말을 옮긴 것이다. 댓글에는 "경험이라는 걸 핑계삼아 하는 사치와 허세를 꼬집는 말"이라며 대체로 공감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소수지만 경험을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내용도 있었다.
해외 여행도 비슷하다. 어떤 사람들은 청년 시절 반드시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여행을 해보라고 조언한다. 반면 청년 시절은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행과 같은 사치를 부리는 것보다 저축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거다.
개인적으로 "여행은 대체로 좋은 경험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대체로'라는 전제가 붙은 것은 여행이 좋은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그 여행을 온전하게 즐기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개인의 '준비상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좋은 경험이 된다는 것은 여행을 통해 한 개인의 내면이 확장되고, 사고의 깊이가 깊어지는 순간에 노출되는 상황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하게 호텔에서 쉬면서 사진이나 찍고 돌아온다면 '휴식'은 될지언정 '경험'이 되기는 어렵다.
경험이라는 것은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아주 미량의 물은 콩나물의 뿌리를 통해 흡수된다. 여행이라는 경험도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다만 개개의 콩나물의 뿌리가 얼마나 튼튼한 가에 따라 물을 흡수할 수 있는 정도는 다르다. 아주 튼튼한 콩나물은 물의 수분과 함께 미량의 미네랄과 무기질도 다 빨아들일 것이다. 반면 허약한 콩나물은 대부분의 물을 그냥 흘려 보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도는 인생여행지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인도는 그냥 더럽고 불편한 여행지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는 인도라는 여행지가 주는 다양한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 가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인 류시화는 10여 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책을 펴냈다. 류시화라는 콩나물이 인도라는 토양, 태양, 대기에서 아주 많은 것을 흡수하고 한번 더 성장해 책이라는 결과물을 낳은 것이다. 그는 거리의 걸인도 스승으로 여기며 질문을 던지고 배웠다. 반면 인도에 가서 인도의 더러운 물과 낙후한 시설, 길거리의 거지들에게 불쾌감을 느끼기만 했다면 그의 인도 여행은 잠시 스쳐가는 바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지갑을 도둑 맞은 상황을 가정해 보자. 누군가는 그 일에 대해 단순히 화가나고 짜증이 난다거나 이번 여행은 망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 현지 경찰을 만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하며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해당 나라의 경찰 시스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될 수도 있고, 도움을 준 서로 다른 피부색의 여행자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행이 좋은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여러가지 전제가 있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사전 독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뇌는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과 실제 경험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독서를 통해 경험을 양분으로 바꾸는 근력을 평소에 쌓아 둔다면 여행을 통해 느끼는 경험의 폭도 더 커질 것이다. 독서를 통해 가보지 못한 세계 곳곳을 상상으로 여행하며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올릴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보는 만큼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다'.
김영하 작가는 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은 몸으로 읽어야만 하는 텍스트"라고 말했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 안에 있는 것은 단순히 흰색 종이와 검은색의 글씨지만 그 것을 읽어내고 어떻게 해독해 내느냐에 따라 독서의 효과도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방송인 박명수씨가 말한 유럽에 가고, 일본에서 라멘을 먹는 것이 경험이 되지 않는 것은 책을 읽을 때 글자만 쳐다보고 그것을 해독해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일본에서 라멘을 먹더라도, 혹은 인도에 가서 거지에게 지갑을 도둑 맞더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경험이 될 수 있다.
전날 판시판 산과 깟깟 마을을 하루에 다 둘러 보느라 매우 피곤했다. 하지만 이날은 아침 7시30분에 슬리핑 버스를 타고 하노이로 이동해야 해서 새벽 같이 일어났다. 버스 집결지에 도착한 뒤 표를 받았다. 출발까지 시간이 남아 작은 노점에서 '반미'를 하나 사 먹었다. 노점 반미는 '복불복'인데 이날은 '불복(별로)'이었다.
버스 내부는 1980년대 유행했을 법한 유흥주점처럼 촌스러운 핑크색으로 도배돼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잠만 잘 생각이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중간에 2번 정도 휴게소에 들렸고, 그 중에 한 번만 내려서 화장실에 들렸다.
약 6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하노이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리는데 하노이는 한국의 장마철처럼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은행에서 비를 피하며 그랩으로 차를 불렀다. 사파와 달리 바로 차가 배차됐다.
비내리는 하노이 거리를 차를 타고 빠져 나갔다. 베트남은 그 전에 여러번 와봤었지만 하노이는 또 다른 도시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경제도시 호치민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오래되고 조금 더 시골스러운 인상이었다.
숙소는 하노이의 중심 '호안끼엠 호수'를 도보 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델리카 호텔'이란 곳이었다. 체크인을 할 때 점원이 지도를 펴고 근처의 가볼만한 곳, 에그 커피 맛집 등을 세세하게 설명해줬다. 생각보다 과하고 친절한 응대에 놀랐는데 근방 호텔의 경쟁이 치열해 다른 곳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녁은 베트남 곳곳에 매장이 있는 '피자포피스'란 곳에서 먹었다. 화덕 피자 맛집으로 유명한 곳으로 매번 베트남에 갈 때마다 리스트에는 올렸지만 가본적은 없는 곳이었다. 한국에서 먹는 가격의 70~80% 수준으로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피자는 나쁘지 않았다. 일행과 함께 루콜라와 생햄이 들어간 피자와 먹물 파스타를 시키고 1+1인 드래프트 맥주를 시켰다. 테이블이 아닌 바에 앉았는데 눈 앞에서 피자가 구워지는 화덕을 직접 볼 수 있는 점은 좋았지만, 열기가 있어서 조금 더운 것은 단점이었다. 우리가 피자를 먹을 때는 만석이라서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피자를 먹고는 노점에서 파는 망고빙수 맛집 '호아베오'에서 망고빙수를 먹었다. 냉동망고 같긴 했지만 우리돈 3000원 정도에 두 명이서 충분히 먹을만한 양이었다.
디저트를 먹고 호안끼엠 호수 안에 있는 녹손 사원을 방문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전시실에 커다란 자라 두 마리를 볼 수 있다. 15세기 중국 명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호수에서 칼을 찾은 한 어부가 명나라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레타 이투왕이란 왕인데 그는 호숫가에서 감사제를 지내는데 자라가 올라와 칼을 채깠다고 한다. 그래서 호안끼엠 호수를 '되돌려 준 칼의 호수'라고 한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있는데 현장에서 듣기로는 "자라가 왕에게 칼을 물어다 줬다"고 한다.
녹손사원을 둘러보고는 하노이의 명물 에그커피를 맛보기 위해 '카페 지앙'으로 향했다. 하노이 에그 커피의 원조라고 알려진 곳이다. 1946년 응우옌 지앙이라는 바리스타가 당시 귀했던 우유를 대신해 달걀 노른자를 사용해 커피 크림 맛을 낸 것이 유래라고 한다. 하노이 곳곳에서 에그커피를 맛볼 수 있는데 다른 가게의 기준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리뷰에 "카페 지앙 보다 맛있는 최고의 에크 커피"라거나 "카페 지앙이 낫다"라는 등의 글을 여럿 볼 수 있다. 좌석은 조금 좁지만 한 번쯤은 가볼만한 곳이다.
에그 커피를 맛보고는 '하노이 기찻길'에서 맥주를 한 잔 했다. 하노이 기찻길은 철로를 따라 수십, 수백개의 카페와 펍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찻길을 접한 카페와 펍에서 음식을 먹다보면 매 정시쯤에 기차가 지나간다. 운이 좋으면 50㎝도 되지 않는 코 앞에서 실제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기념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기찻길 한복 판에서 사진을 찍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운치가 난다. 특히 이날은 비가 왔기 때문에 덥고 축축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에는 그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Ga Dong Duong'이라는 카페에서 시그니처 맥주를 마셨다. 이렇게 하노이에서의 첫 하루가 지났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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