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된 영화 속 과학] ②인간의 감정에 공감하는 AI…'그녀(2014)'
[편집자주] 공상과학소설(SF) 영화에 등장하는 놀라운 첨단 과학기술은 관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기술의 힘을 빌린 영화 속 주인공은 현실세계의 우리들보다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기도 하고 때때로 기술이 일으킨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고뇌에 빠지기도 합니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이러한 영화 속 상황을 곧 현실로 이끌어냅니다.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던 첨단 기술이 우리 삶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이러한 기술들이 우리 삶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2014년 개봉안 영화 <그녀>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다. 아내와 별거 중인 주인공은 타인의 마음을 전해주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AI) 운영체제 '사만다'를 만나게 된 주인공은 '그녀'와 대화하고 교감하는 나날을 시작한다. AI와의 대화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던 주인공은 어느덧 자신이 AI에게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이성적 호감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격을 향해 이뤄질 수 없는 마음을 품게 된 주인공은 감정의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인간에 지친 현대인들이 <그녀>의 주인공처럼 AI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일은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깊은 감정을 갖진 않더라도 대형언어모델(LLM)을 활용해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소통과 대화를 즐기곤 한다.
정교한 감정 교류가 가능한 AI가 등장할 날도 머잖았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인간의 감정이 생기는 메커니즘이 점점 더 선명히 규명되고 있으며 이를 구현할 AI 기술도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의 감정 이해하는 '감성 컴퓨팅' 기술
AI가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처리하는 기술을 감성 컴퓨팅(Affective Computing)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에 지능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연스럽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컴퓨팅 시스템을 의미한다. 추상적인 개념인 감정을 AI와 같은 기계가 학습하고 이를 응용하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이 주된 과제다.
1997년 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개념인 감성 컴퓨팅은 크게 인간에 대한 연구와 기계에 대한 연구로 분류된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감정을 정의하는 게 핵심이다. 복합적인 감정들이 혼재되는 복잡다단한 인간 감정의 발현을 기계가 정의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분류하는 기술은 현대 과학기술로도 풀기 어려운 난제로 꼽힌다.
기계에 대한 연구는 인간의 감정을 식별하고 처리하는 기술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텍스트, 음성, 표정, 제스처, 생리적 신호와 같이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 신호를 분석하고 이렇게 수집한 감정 신호를 정교하게 분류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기계가 상대방의 감정에 알맞는 적절한 상호작용을 하는 기술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다.
AI와 같은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식별하기 위해선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필수적이다. 중국 항저우 저장연구소 인공지능센터가 1월 국제학술지 '인텔리전트 컴퓨팅'에 발표한 리뷰 논문에 따르면 학계에선 주로 통신사의 음성 데이터를 활용해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를 얻는다. 명확한 상황이 설정된 영화 속 대사 음성도 유용한 데이터가 된다.
음성 데이터에서 특정한 감정을 식별하기 위해선 고도의 음향 기술이 필요하다. 기본 주파수와 지속 시간, 속도를 벡터로 표현해 특정한 감정이 발현될 때 나타나는 특징을 통계값으로 나타낸다. 얼굴 표정이나 심박수 변화, 근육 긴장 등과 같은 생리적 신호를 통해 감정을 분석하는 기술도 같은 방식을 활용한다. 최근에는 복수의 데이터를 결합해 분석하는 다중모델융합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 'F'아닌 'T' 성향 AI…질문에 대한 답보다 감정적 위로 중시
오랫동안 이어진 감성 컴퓨팅 기술은 최근 속속 결과를 내는 모습이다. 사람의 감정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는 평가다.
2022년 호주 라트로브대 연구팀은 환자를 대상으로 한 AI 챗봇 프로그램이 지식을 제공하는 기능 뿐만 아니라 환자의 감정 상태까지 배려한 답변을 하는 AI를 개발하고 국제학술지 '미래 세대 컴퓨터 시스템'에 발표했다. 음성으로 답변을 읽어주는 이 챗봇은 상황에 따라 음성의 톤이나 속도를 조절하며 상황에 적절한 발화 기능을 수행한다.
대화에서 문맥에 따라 적절한 응답을 수행하는 AI도 있다. 2021년 중국 허페이공대 연구팀은 앞서 진행된 대화의 흐름을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어투를 사용하는 챗봇을 개발했다. 국제학술지 'IEEE 트랙잭션스 온 컴퓨셔녈 소셜 시스템'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이 챗봇은 대화 과정에서 습득한 음성 정보를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에 알맞는 감정 반응을 생성한다. 사람 간의 대화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지 잡아낸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는 AI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다. 최근 박재훈 국립창원대 교수 연구팀은 컴퓨터가 사람의 다양한 표정, 행동, 말, 음성, 문자 등의 정보를 복합적으로 고려해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감정의 반전이나 언행과의 불일치를 분석하는 방법론을 제안한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제학술대회 '혁신적 컴퓨팅, 정보 및 제어 국제학회 2024'에서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을 구현하는 AI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질 전망이다. 미국 프린스턴대 연구팀은 18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인지과학 동향 저널'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을 통해 학습하는 AI 모델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인간처럼 기존의 정보, 시뮬레이션, 유추, 추론 사고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주입되지 않은 정보를 스스로 생각해 만들어낼 수 있는 AI는 이전보다 더 인간에 근접했다는 것이 연구팀의 이야기다.
<참고 자료>
- doi. org/10.34133/icomputing.0076
- doi.org/10.1155/2022/9601630
- doi.org/10.1109/TCSS.2021.3095479
- doi.org/10.1016/j.future.2021.08.015
- doi.org/10.1016/j.tics.2024.07.007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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