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연금개혁 정면돌파 승부수…'의회 패싱'에 후폭풍 예고
야당 즉각 불신임안 제출…"삶의 방식에 습격" 시민공분 확산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에마뉘엘 마크롱(45)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제도 개편을 위해 정면돌파 승부수를 던졌다.
의회를 묵살하는 일방적인 행보인 까닭에 야당은 물론 시민사회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으며, 민주주의적 정당성과 경제적 타당성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큰 역풍을 각오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프랑스 정부는 16일(현지시간) 연금 수급을 시작하는 은퇴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개정하는 방안을 하원의 표결 없이 처리하기로 했다.
이는 르네상스 등 집권 여당의 하원 의석이 전체 577석 가운데 과반에 39석 미달하는 250석이기 때문이다.
같은 중도성향으로 정책을 연대할 수 있는 우파 공화당은 88석을 보유하지만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이 사안에 제휴하지 않기로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긴급사태에 한해 정부가 의회를 건너뛰고 입법할 수 있는 헌법 49조 3항을 이번 조치의 근거로 삼았다.
이 같은 일방 행보는 바로 프랑스의 민주주의 퇴보, 마크롱 대통령의 권위주의 논란을 불렀다.
특히 연금제도 개정은 프랑스 국민의 전통적 공감대를 건드리는 민감한 사안인 까닭에 공분이 커졌다.
많은 프랑스인은 은퇴를 노동자들이 기나긴 투쟁을 통해 얻은 역사적 성취이자 사회연대를 상징하는 자부심으로 여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프랑스에서 노동이 은퇴 이후 삶으로 상쇄되는 '형벌'로 널리 간주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NYT는 "많은 시민이 마크롱 대통령의 일방 행보를 삶의 방식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여긴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프랑스 공영방송 프랑스24는 "마크롱이 '핵옵션'을 사용해 프랑스 정치에 가장 뜨거운 국면이 도래했다"며 사안의 폭발성을 강조했다.
마크롱 대통령에 의해 정면으로 묵살당한 프랑스 야권은 국민 삶에 중대한 변화를 주는 사안에 대한 독단, 민주주의 훼손이라고 주장하며 총공세에 나섰다.
극우성향 국민연합의 대표 마린 르펜은 헌법 49조 3항에 저항하는 절차인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즉각 제출하기로 했다.
프랑스 정파 스펙트럼에서 국민연합의 반대쪽인 좌파연합 뉘프에서도 "의회가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다.
샤를 드 코르송(무소속) 의원은 프랑스 BFMTV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보유한 소수정당의 실패"라며 "그들은 의회에서 소수일 뿐만 아니라 전체 국가의 소수로서 민주주의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신임안이 부결되면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 개정안은 바로 법률로 발효된다.
가결된다면 내각이 총사퇴해야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해산과 새로운 의회 선거로 맞설 수 있다.
불신임안의 통과 기준은 과반 지지다. 캐스팅보트를 쥔 공화당은 여기에서는 르네상스에 연대할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마크롱 대통령의 최대 과제는 그의 일방 행보가 사실은 민주적인 것이며 공익과 직결된다는 점을 국민에게 설득하는 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국정운영에 관한 여론은 별로 좋지 않고 개정안에 대한 반감이 심한 터라 어려운 시험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집권 이후부터 특유의 권위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절대군주나 나폴레옹 행세를 한다는 냉소를 샀다.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는 작년 5월 취임 후 의회를 따돌리는 헌법 조항을 이날까지 11차례나 발동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 개혁은 시급한 사안이 아닌데 문제를 부풀려 이번 결정을 밀어붙였다는 타당성 논란도 있다. 미래 경제를 위해 연금제도를 개정해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의회와 국민을 배제할 정도로 시급한 사태냐는 것이다.
투자은행 전문가 출신인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집권 이후 프랑스 경제체제 개편을 숙원으로 삼았다.
그는 국민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살게 된 현시점에 은퇴 연령 62세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제도라는 신념을 굳혔다.
실제로 유럽연합(EU) 회원국 대다수는 이 같은 추세에 맞춰 은퇴 연령을 65세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프랑스와 함께 EU 쌍두마차로 불리는 독일은 은퇴 연령이 65세 7개월이고 이탈리아는 67세에 이른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방, 에너지 지출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경제체질 개선의 필요성을 더 강조했다.
그러나 프랑스 고유의 문화가 반영된 사회질서를 대통령이 벼락 치듯 바꾸는 게 합당하느냐를 두고 반발은 지속될 전망이다.
NYT는 마크롱 대통령이 은퇴 연령 상향조정을 국가재정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여겨왔다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를 배제하고 연금개혁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이는 '피로스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왕으로, 전투 능력에 있어선 최강자로 꼽혔지만 너무 잦은 전투로 병사들을 소모하다 결국 패망한 인물로 묘사된다. 즉 마크롱이 연금개혁이라는 싸움에서 이길지언정 아주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집권 1기에도 거센 반발 속에 연금 개정안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개정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보건·경제 위기로 인해 정책역량에 여력이 떨어져 보류됐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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