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본에 제 이름이 없었어요.”
연기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세상의 많은 배우들처럼 김금순도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단호했던 건 아버지였다.
교사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응당 마땅 고도리’로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받으며 자란 딸이, 느닷없이 배우가 되겠다며 진주에서 연극 무대로 나섰으니 말이다.

중학생 시절, 학교 연극에서 시작된 꿈은 간절했고, 쉽게 포기할 마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권을 만들기 위해 고향 동사무소를 찾은 김금순은 등본에서 자신의 이름이 말소됐다는 말을 듣게 된다.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 그런 사람 안 삽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주민등록상 주소를 정리해버린 것이었다. 말 그대로 ‘호적에서 파였다’는 소문은 여기서 시작됐다.

물론 법적으로 호적을 파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엔 그냥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안 산다"고 신고만 해도 등본에서 말소가 가능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버지는 "그렇게 오래 연기할 줄 몰랐다. 그때 잘 도와줄 걸, 미안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말 한마디에, 김금순도 그동안 꼭 붙들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벌금 내고 등본은 다시 살렸어요”라는 말에 웃음이 났지만, 그 안에는 10년 넘는 시간 동안 말없이 쌓인 가족 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도, 연기는 평생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육아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김금순은 연기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행선지는 브라질. 지금의 남편을 만나 정착한 그곳에서 두 아이를 낳고, 유치원과 도장, 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았다.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던 그 시절, 그녀는 사업가로서의 삶에 충실했다.
“건물 한 채를 통으로 쓰고 살았어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당시 김금순은 꽤 큰 규모의 운영을 도맡고 있었다.
연극 무대 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 그곳에서의 10년은 김금순을 조금 더 단단하게, 또 한편으론 갈망하게 만들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둘째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시 연기에 대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이건 내 옷이 아닌 것 같다”는 감정이 계속 밀려왔다. 마침 한 지인이 “영화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권했고,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연극 경력을 기반으로 프로필을 올렸다.

연락이 왔다.
첫 단편영화에 출연했고, 소정의 거마비를 받았다. ‘아, 이거다’ 싶은 직감. 그렇게 김금순은 다시 연기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2011년, 그렇게 매체 연기에 발을 들인 뒤부터 김금순은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왔다.
단편과 단역을 전전하며 생계형 배우로 살던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은 영화 <정순>이었다.
한 중년 여성이 겪는 디지털 성폭력과 그로 인한 무너짐,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담은 이 작품은 김금순에게도, 관객에게도 진한 여운을 남겼다.

전주국제영화제 대상, 로마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그리고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까지.
화려한 수상 이면에는 정순이라는 인물을 꿰뚫어 본 배우의 내면이 있었다
누군가는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정순처럼 웃는 대신 속으로 삼키고, 참고, 버텼다. 한 장면 한 장면에 담긴 감정선은 그렇게 현실처럼 다가왔다.

이후로도 영화 <카트>, <변호인>, <달이 지는 밤>, <브로커>, 드라마 <안나>, <진검승부>, <히어로는 아닙니다> 등에서 그녀의 모습은 부지런히 이어지고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상을 지키며, 틈틈이 책을 읽고, 캐릭터 분석에 몰두하는 삶.
언젠가 SF 영화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액션 연기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김금순의 목소리는 다시 시작하는 신인의 그것처럼 생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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