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에 무궁화가 심어진 깊은 뜻은?

[조민제의 식물 이름 이야기]

병산서원 뜰 안의 무궁화 그루의 모습.

『모당일기』와 사당에 심어진 무궁화

“八日 謁先祠 在堂 無窮花爛開(8일에 선사에 참배하였다. 사당에 머물렀다. 무궁화가 화려하게 피었다) - 손처눌, 『모당일기』, 권4 중에서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은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퇴계 이황 계열의 영남 문인(유학자)으로 호는 모당(慕堂)이다. 15세 되던 1567년(명종 22년)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탐구에 전념했다. 임진왜란 당시 팔공산 부인사에서 의병장으로서 거병하여 대구 파잠의 협곡에 복병을 설치하여 왜군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전란 이후인 1602년에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연경서원을 중수하기도 했다. 이후 1613년 퇴계 이황을 연경서원에 배향(配享, 신주를 모심)했으며여생을 서원과 향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활동에 주력했다. 저서로 『모당집』과 『모당일기』가 있다.

『모당일기』(慕堂日記)는 손처눌이 48세가 되던 1600년 1월 8일부터 78세가 되던 1630년 1월까지 작성한 일기책으로 6권2책의 필사본으로 꾸며져 있다. 『모당일기』 권4의 갑인년(1614년) 음력 6월 8일 일기에는 손처눌이 조상을 모신 선사에 참배하고 사당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무궁화가 곱고 화려하게 피었음이 기록돼 있다.

제례를 행하는 사당에 무궁화가 심어진 이유는 손처눌이 임진왜란 이후의 활동이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활동에 전념하면서 유학자로서 『주자가례』에 근거한 의례생활을 꾸준히 실천했던 점을 고려하면(이에 대해서는 김형수 외, 『모당일기』, 은행나무(2021), 207쪽 이하 참조), 무궁화(槿)가 『시경』(詩經), 『예기』(禮記) 및 『이아』(爾雅) 등 유교의 경전에 기록된 식물이었던 점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손처눌은 『모당일기』에서 무궁화를 유교의 경전에서 사용한 순화(舜華), 근(槿), 목근(木槿) 또는 근화(槿花)라고 쓰지 않고 우리말을 한자를 빌어 표현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한자어인 '無窮花'(무궁화)라고 표기했다.

이는 중국에서 전래되었지만 우리나라에 정착되어 토착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서 무궁화에 대한 우리만의 인식과 이해에 따른 것임을 뜻한다.

즉, 중국에서 목근(木槿)은 조개모락(朝開暮落: 아침에 피어 저녁에 짐)하는 순간의 영광을 누리는 꽃을 의미하였으나, 우리에게 무궁화는 오늘 졌지만 내일 다시 피어나는 다함이 없는 무궁(無窮)한 꽃을 표상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그의 저서 『학봉일고』(鶴峯逸稿)의 「無窮花」(무궁화)라는 시에서 "名花百日又無窮"(명화백일우무궁: 좋은 꽃 백일피고 또 다시 무궁하다), "萬化誰探無極翁"(만화수탐무극옹: 만물 중에서 그 누가 무극옹을 찾아보나)라고 노래하여 무궁화를 무궁하고 무극한 꽃으로 인식했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근래에 오래된 무궁화 나무들이 안동의 예안향교, 풍천의 병산서원 그리고 강릉 방동리의 박씨 재실 등 유교적 의례가 행해지는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은 17세기 초반에 저술된 『모당일기』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추정된다. 이러한 문화는 『모당일기』에 근거할 때 최소 400년을 넘은 역사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회은유고』의 무궁화

“輓詞 又 順天張奎燮 槿花飛渡大洋東肯雜緇髡食息同一片丹心歸保國九原無愧拜文忠”(만사 순천장씨 규섭, 무궁화 꽃 날리는 우리나라에 어찌 잡스러운 왜적과 같이 살겠는가?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나라 은혜 보답하니 지하에서 문충공을 배알해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 류도발, 『회은유고』, 권지육 부록 중에서 『회은유고』(晦隱遺稿)는 류도발(柳道發, 1832~1910)의 생전 작품을 모아 정리한 유고집으로, 8권 4책으로 된 석판본의 책이다. 류도발은 풍산 류씨(柳氏)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10세 손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어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하여 임진왜란의 국란을 극복하는 데 이바지하고,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부여됐다. 류도발은 유학자로 고향 풍산에서 학문에 정진하다 1910년 8월 29일에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11월 11일에 일체의 물과 음식을 끊고 「자탄」(自嘆)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단식에 돌입하여 17일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자탄(스스로 탄식함) : 태어나 재주와 지혜 없음이 나만한 이 없는데 차마 우리나라의 옛 모습과 다름을 볼 수 있겠는가, 풍하(楓霞)의 이령(二令)<주>이 나보다 앞서 서거하셨으니 같은 때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주> 풍하의 이령(楓霞 二令) : 고종 때의 문신으로 경북 봉화 출신 이면주((李冕宙, 1827~1910)를 말한다. 그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0년 10월 10일에 자결했다.

류도발이 순절하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애도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명정(銘旌: 죽은사람의 관직 또는 성씨 따위를 적은 기로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 것을 말함)은 '大韓處士'(대한처사)로 했다. 『회은유고』의 권지육에는 부록으로 그의 사후에 그를 추모한 여러 만사(輓詞: 죽은 이를 슬퍼하고 지은 글을 말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장규섭(張奎燮, 생물연도 미상)의 글이 실려 있다.

그 글은 대한제국의 상징화이었던 근화(槿花, 무궁화)를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을 인정할 수 없음을 호소하고, 류도발의 뜻이 그의 조상 서애 류성룡(문충공)에 닿아 있음을 기리고 있다.

병산서원 뜰의 무궁화가 만개한 모습.

병산서원에 무궁화가 심어진 까닭은?

'병산서원'은 고려중기의 교육기관 풍악서당에서 비롯되었다. 1575년에 지역 유림들에 의하여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불렀다. 1614년에 문인들이 류성룡의 학문과 성품을 기리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해 위판을 봉안했다가 1629년에 병산서원으로 배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림들이 모여 함께 공부했던 병산서원의 뜰 한가운데에는 전형적인 무궁화 개체들과 외형이 달라 보이는 아주 오래된 무궁화 한그루가 서 있다. 언제 누가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무궁화를 심었는지, 현존하는 무궁화 이전에 또 다른 무궁화가 있었는지 등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모당일기』와 『회은유고』에 따르면 병산서원에 심긴 무궁화는 유학의 옛 문헌에 근거하되 우리만의 독자적 해석으로, 무궁하다는 의미를 담겨져 있고 식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400년이 넘은 옛 문화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 오래된 무궁화는 이제 늙고 기운이 없이 쇠락의 길을 가고 있다. 백령도와 예안향교의 무궁화는 100여년의 세월을 견디다 고사한지 오래이고, 이제 강릉 방동리 박씨 재실의 무궁화만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오래된 무궁화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병산서원에 심어진 무궁화에 대해 ①과학적 방법에 근거하여 나무의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②보호가치가 있다면 천연기념물로 제정이 필요한지, ③쇠약해지는 것을 막고 보호할 방안을 무엇인지, ④다른 무궁화 재배품종(cultivar)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⑤있다면 새로운 재배품종으로 선별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는지, ⑥체계적으로 '후계목'을 육성하고 널리 보급할 방안은 무엇인지 등을 확인했으면 한다. 육성과 보급의 방안에 따라 실행하는 것은 개인 몇몇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며 문화유산의 보호 차원에서라도 국가가 나서야 하는 일로 여겨진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 조민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29기로 수료한 후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야생 식물 탐사와 옛 식물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와 책으로 ‘한국 식물이름의 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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