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다발 호출기 폭발 어떻게 가능했나…‘이스라엘 생산·유통 개입설’ 힘 실려
레바논에서 헤즈볼라 대원들의 무선 호출기가 동시다발 폭발한 이후 기술적으로 어떻게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두고 여러 설명이 제기되고 있다. 폭발 배후가 이스라엘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까진 무리 없이 의견이 모이지만 문제는 호출기 폭발을 어떻게 기획·조작했느냐는 것이다. 호출기에 폭발물을 넣기 위해 제작이나 유통 단계에서부터 개입했으리란 추측에 힘이 실린다.
18일 뉴욕타임스(NYT)·CNN 등을 종합하면 전날 오후 3시30분쯤 레바논 전역에서 호출기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헤즈볼라 지도부가 발송한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가 도착했고 확인을 하려던 찰나 손이나 주머니, 가방 안에 있던 호출기가 폭발했다. 폭발은 1시간가량 이어졌으며 폭발한 호출기는 수천대에 달한다. 이로 인해 최소 12명이 숨지고 2750여명이 다쳤으며 이중 200여명은 중태다.
어떻게 호출기 수천대가 동시에 폭발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추정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일 가능성이 높은 어떤 외부 세력이 호출기를 변형·조작했으리란 쪽으로 수렴한다. 정리해 보면 생산이나 유통 단계에서 호출기에 폭발물이 설치되는 등 장치 일부가 변형됐고, 이후 원격 조작으로 호출기에 동시다발적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NYT는 미국 등의 관계자를 인용해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 수입된 대만산 호출기 안에 폭발물 수십 그램을 배터리 옆에 심었다고 전했다. 헤즈볼라는 대만 골드아폴로사에 호출기 모델 4종류를 주문했는데, 호출기가 레바논에 도착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폭발물 부착을 완료했다는 것이다.
호출기는 휴대용 전자기기에 많이 쓰이는 AAA 배터리를 사용했다. 배터리 자체가 폭발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폭발의 피해 수준이 과거 배터리 폭발 사례의 피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배터리 전문가 폴 크리스텐슨 뉴캐슬대 교수는 “작은 배터리가 불길에 휩싸이더라도 치명적인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며 배터리 자체가 폭발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알자지라에 밝혔다. 한 사이버보안 연구원도 “호출기가 (사후에) 해킹된 것이 아니라 배송 전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폭발 규모를 보면 조직적이고 정교한 공격인 듯하다”고 CNN에 밝혔다.
호출기에 폭발물 부착, 언제·어떻게 했나…호출기 업체 “대만산 아니야”
통신 기기에 폭발물을 부착해 조작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AP통신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적의 휴대폰에 폭발물을 넣은 적이 있으며, 해커가 기기에 악성코드를 주입해 과열시킨 뒤 폭발을 유도하는 사례도 있었다.
다만 호출기 생산과 유통의 어느 단계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레바논 고위 관계자는 “이스라엘 모사드가 유통이 아닌 생산 단계에서부터 호출기를 개조했다”고 로이터에 밝혔다. 그는 “모사드는 폭발물이 부착된 보드를 장치 내부에 넣었는데 이 보드는 암호를 수신할 수 있다. 어떠한 판독 장치로도 이를 감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암호화된 메시지가 호출기에 전송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호출기 제조사로 지목된 골드아폴로사는 이번에 폭발한 호출기가 대만이 아닌 유럽에서 제조됐다고 밝혔다. 대만에서 중동으로 문제의 호출기를 수출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는 대만산 호출기가 레바논으로 수입돼 헤즈볼라 대원들에게 배부됐다는 NYT 보도와는 상이한 설명이다.
쉬칭광 골드아폴로 회장은 17일 기자들에게 “3년 전 유럽의 한 유통업체와 계약을 체결했다. 이 업체는 처음에는 우리의 호출기와 통신 제품을 수입했으나 나중에는 골드아폴로 브랜드를 사용해 자체 호출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브랜드 상표만 제공하며 디자인이나 제조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쉬 회장은 해당 업체 이름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으나, 레바논 고위 관계자는 이 업체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본사를 둔 ‘BAC 컨설팅’이라고 로이터에 밝혔다.
대만 고위 관계자 역시 “골드아폴로의 호출기가 대만에서 레바논이나 중동으로 배송된 기록이 없다. 골드아폴로는 대만에서 호출기 약 26만대를 수출했는데 대부분은 미국과 호주로 갔다”고 CNN에 밝혔다.
로이터는 여러 소식통을 인용해 이날 공격이 수개월에 걸쳐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레바논 고위 관계자는 “이스라엘 모사드가 몇 달 전 호출기 5000개에 폭발물을 심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2월 헤즈볼라는 대원과 그 가족들에게 이스라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휴대폰 대신 호출기를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통신 상실한 헤즈볼라, 군사력에 타격”…이스라엘의 공격 의도는
이번 사태가 헤즈볼라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데이비드 로슈 미 국방대 교수는 “이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정보에 완전히 놀아났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제 헤즈볼라 대원들은 더 이상 장비(호출기)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통신 능력의 후퇴로 이어진다”고 알자지라에 밝혔다. 그는 “헤즈볼라는 네트워크 조직으로서 실시간 통신이 잘 돼야 하는데, 이제 더 이상 이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며 “통신 능력 손상으로 인해 헤즈볼라는 상당한 군사력을 상실했다”고 설명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복수를 다짐했다.
이스라엘은 공격 배후설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내심 확전을 원하지는 않으리란 분석이 주를 이뤘는데, 이제는 이 전제가 흔들리게 됐다. 이날 호출기 폭발 사태는 지난 7월 헤즈볼라 고위사령관이 암살된 이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로켓 수백발을 쐈을 때보다 더 큰 긴장을 낳고 있다. 유럽 항공사들은 텔아비브행, 베이루트행 항공편을 잇달아 중단했다.
이스라엘의 의도가 전면적인 확전인지 겁주기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레바논 저널리스트 킴 가타스는 “‘너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헤즈볼라에게 보여주려는 방법일 수도 있고, 본질적으로는 겁을 줘서 복종시키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더 큰 보복을 당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CNN에 밝혔다. CNN 분석가 존 밀러 역시 이번 사태가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때에 버튼만 누르면 당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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