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
인조와 갈등으로 의문의 죽음
1637년(인조 15) 2월 5일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는 청나라의 수도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의 굴욕의 조건으로,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인조실록’은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니, 신하들이 길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하였는데, 혹 재갈을 잡고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가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에 정명수(鄭命壽)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하였으므로 이를 보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여 당시의 참담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2022년 11월에 개봉된 영화 ‘올빼미’는 소현세자의 독살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인조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1645년 4월 26일 소현세자가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조실록’ 기록에는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붉은 피가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하여, 세자의 독살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마친 후, 세자에게 석철(10세), 석린(6세), 석견(3세)의 세 아들이 있었지만, 세손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물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조는 자신의 후계자로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을 지목하였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도 왕위는 세자의 아들이자 손자인 정조에게 물려준 사례를 보아도 분명 파격적인 후계자 승계였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 인질 생활을 한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北學) 사상을 조선에 수용하여 변화와 개혁을 할 것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현재의 왕’ 인조와 정면으로 충돌하였고, ‘독살’이라는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효종 즉위 후 북벌이 국가 정책이 되면서, 북학이 다시 자리를 잡기까지는 100여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지금도 많은 아쉬움을 주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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