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마음 움직이자” 스터디 나선 팬덤… 법원은 탄원서 전쟁 중
“우리 가수를 향한 진정성을 담아 보낸다면 판사님도 돌덩이가 아닌 이상 녹아내리리라 믿습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광진구 뚝섬 한강공원에서 중년 여성 6명이 둘러앉아 A4용지에 탄원서를 쓰고 있었다. ‘김호중♥아리스’라고 새겨진 보라색 펜을 든 60대 여성 A씨는 ‘서울중앙지법 주소’와 ‘사건번호’ 쓰는 법을 일대일 과외하듯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트로트 가수 김호중의 팬들이다. 위험운전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김호중의 다음 달 1심 선고를 앞두고, 팬들이 탄원서 작성법을 공부하는 스터디 모임을 자발적으로 꾸린 것이다.
최근 법원에서 재판받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유명인들의 팬덤에서 ‘탄원서 쓰기’ 열풍이 불고 있다. ‘좋은 탄원서 작성법’을 영상으로 만들어 서로 공유하거나, 탄원서 작성법을 가르쳐주는 모임을 갖는 식이다. 탄원서는 억울한 사정이나 선처·엄벌을 구하기 위한 의견을 담은 문서다. 법원에는 주로 사건 당사자·관계자가 탄원서를 보내는데, 제출 자격·횟수·내용 등에 제한이 없어 재판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지지자들도 탄원서를 보낼 수 있다.
서울 중랑구에 사는 박모(65)씨는 이날 1시간 가량 지하철을 타고 김호중 탄원서 스터디를 찾았다. 김호중의 이니셜이 박힌 기타 브로치를 모자에 단 박씨는 “나도 음악만 하느라 평생 탄원서라는 건 써본 적이 없는데, 판사님께 제대로 된 탄원서를 써 가수에게 도움이 됐으면 해 스터디에 나왔다”며 “법정에서 다 전달되지 못한 가수의 사정과 팬들의 간곡한 마음을 탄원서에 담았다”고 했다.
지지자들에게 탄원서는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창구이자 수단이다. 김호중 탄원서 스터디를 주도한 A씨는 “김호중의 공개 재판 과정을 챙겨봤는데 재판부나 변호인 등이 전하지 못한 말이 많은 것 같아, 탄원서로라도 꼭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탄원서 스터디를 만든 이유에 대해 A씨는 “김호중 팬들은 법률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중년 여성이 대부분이라, 탄원서를 어떻게 써야 할 지 막막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나마 사회생활을 하며 탄원서를 써본 경험이 있는 내가 재능기부 차원으로 나서게 된 것”이라고 했다. 10월에만 스터디를 3번 진행했고, 참여 인원은 수십명이 넘는다고 한다.
재판부를 향한 탄원서 공세는 일종의 팬덤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지자들도 오는 11월 공직선거법 위반·위증교사 혐의에 대한 선고를 앞두고, 탄원서 물량 공세에 나섰다. 지난달 25일 결심 공판 이후 열흘간 재판부에 접수된 탄원서만 100여 건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 지지자들은 유튜브에 ‘탄원서 쉽게 쓰는 방법’ ‘전 국민 탄원서 쓰기’ 등을 주제로 영상을 올려, 탄원서 양식과 작성법을 자세히 공유하고 있다.
걸그룹 뉴진스의 팬덤 ‘버니즈’ 1만 명도 지난 5월 민희진 어도어 전 대표의 해임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당시 민 전 대표가 자신을 해임하려 하는 하이브를 상대로 가처분을 낸 사건에서 팬들이 법원에 “민 대표의 해임을 반대한다”며 옹호하는 탄원서를 낸 것이다. 그러자 하이브 측을 지지하는 업계 관계자들도 탄원서 수십장을 법원에 제출해 ‘탄원서 맞불 작전’에 나섰다.
잇딴 탄원서 대란에 법원도 업무가 크게 늘고 있다. 법원 관계자는 “하루에도 수십 장씩 탄원서가 들어오면 분류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며 “특히 전자 소송으로 진행되는 민사 사건은 탄원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 직원들이 탄원서를 하나하나 스캔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사건 당사자나 관계자가 아닌 탄원서가 재판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수많은 탄원서가 들어온다면 재판부로서도 신경을 아예 안 쓰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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