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방망이 사법부 불신? ‘지옥 판사’ 이유 있는 인기
“바이 알 인페르노(Vai all’inferno·지옥으로 떨어져).”
보랏빛 눈동자로 상대를 노려보던 강빛나(배우 박신혜)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을 높이 든다. 형형하게 빛나는 보라색 칼끝은 죄인의 심장을 향하고, 칼 손잡이에 새겨진 ‘게헨나(gehenna·지옥·드라마 속에선 그리스어 geenna로 표기)’ 인두는 지옥 불처럼 붉게 타오른다. 죄인 이마에 낙인이 찍히는 순간, 지옥의 문이 활짝 열린다.
SBS 금토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이하 ‘지옥 판사’) 속 형사재판부 판사 박신혜는 중죄인에 대해 두 번의 재판을 연다. 한 번은 인간의 모습을 한 강빛나 판사로, 두 번째는 강빛나의 몸에 들어간 살인 지옥의 악마 재판관 유스티티아로서다. 인간의 법정에선 죄질보다 ‘가벼운’ 처벌을 내려 피고를 풀어준다. 정의를 배신한 판사 박신혜를 향해 피해자와 유가족은 분노를 터뜨린다.
자신을 향한 비난을 뒤로하고 법정을 나선 박신혜는 풀려난 죄인을 몰래 찾아가 이렇게 외친다. “이제부터 진짜 재판을 시작할게! 지옥으로!” 박신혜의 커다란 눈은 터질듯이 더욱 커지고, 광기에 찬 듯한 입매가 씰룩일 때 보는 이의 마음도 바짝 졸아든다. 박신혜의 두 번째 끝날 때 쯤, 시청자들의 마음은 비로소 ‘정의가 실현됐다’는 느낌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지난 2003년 아역으로 데뷔해 올해로 20년 넘는 ‘연기 관록’을 보여주는 박신혜가 몸을 날려 죄인을 심판하는 장면이 거듭될 때마다 드라마 시청률이 함께 올랐다. 지난 9월 21일 시청률 6.8%(닐슨 전국 기준)로 시작해, 지난 12일 방송된 8회에선 13.6%, 최고 16.1%까지 치솟으며 시청자를 사로잡은 수작으로 자리 잡았다. 총 14회로 2회를 남겨둔 12화까지 꾸준히 10%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마지막까지 인기를 이어갈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받은 대로 되갚는다’는 응징의 법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판사의 손으로 직접 죄인의 목숨을 거두고 영혼을 지옥으로 보낸다는 점에서 사적 복수를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사법적 판단을 받게 하는 기존 ‘안티히어로물’과도 차별된다. 그만큼 시청자들이 느끼는 전율의 크기는 배가된다. 박신혜 앞에 서는 죄인들은 악마도 놀랄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기 때문. 교제 폭력 가해자 문정준(배우 장도하), 보험 살인 및 아동 학대 가해자 배자영(배우 임세주), 일가족 살해 후 다중 인격 등 심신상실 상태 범행을 주장한 가해자 양승빈(배우 양경원), 파업을 주도한 노조위원장에 대한 무자비한 폭행에 자살로 위장하기까지 한 재벌 갑질 가해자 최원중(배우 오의식) 등 법정에 서는 이들은 저마다 기억상실, 심신상실, 증인 매수 등 각종 감형 사유를 들이대며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간다. 에피소드의 일부는 실제 사건에서 차용해 시청자들이 갖는 현실적 공분이 적절하게 녹아들도록 했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이례적으로 ‘잔혹하다’는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신혜가 악인들을 응징하면서 각종 흉기를 휘두르고 피를 튀게 하는 장면이나, 사탄과 결탁한 ‘인간’ 이규한이 손도끼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등에 대해 과도하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OTT 등에 나오는 의미 없는 잔혹한 장면에 비해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표현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옥 판사’는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법원이 용서하는가” 등의 대사를 통해 사법적 정의의 본질에 대해 되묻고 있다. 그동안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던 사법 제도와 정의, 시민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솜방망이 처벌에 대해 간접적으로 경고를 내리고 있다는 평가. 실제로 시청자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함무라비 법전 도입이 시급하다” “사형제도 복구하라” “피해자가 가해자가 밝혀질 때까지 벌벌 떠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같은 댓글을 쏟아내고 있다.
더더군다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복귀한 범죄자들이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가려 자신을 변명하는 모습에 공분했던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하재근 문화 평론가는 “그동안 대중의 관심과 분노를 모았던 각종 흉악 사건들에 대해 과연 우리 사법 체계가 상응한 처벌을 내리는지 의심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라며 “피해자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가해자한테 되돌려준다는 드라마의 설정은 실제에선 일어나기 힘들지만, 드라마를 통한 대리 만족의 효과는 오히려 그래서 더 컸고 이는 인기의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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