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점심시간] 토요일의 '아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것

박은정 입력 2022. 11. 2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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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맛이 조화로는 한 끼... 가족이 충분히 행복한 시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 <편집자말>

[박은정 기자]

기다리던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어김없이 배달된 소중한 이틀, 정해진 시간까지 정해진 장소로 가서 주어진 일을 하느라 종종거리지 않아도 되는 휴일의 첫날. 아무리 여러 번 맞이해도 늘 새롭고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한 날의 시작이다.

출근은 안 하지만 일찍 일어난다. 아니 오히려 더 일찍 일어나게 된다. 마치 학교 가는 날엔 늦잠 자던 아이가 소풍날 아침에는 깨우지 않아도 벌떡 일어나듯이. 딱히 뭘 하는 건 아니지만 토요일이란 이유만으로 가슴은 부풀어 오르고 기분은 한없이 가볍다.

'아점' 먹으러 가는 길
 
▲ 자전거 타고 달리는 길 무계획 여유로운 토요일, 아점먹으러 가는 길
ⓒ 박은정
 
보통 읽고 싶었던 책을 읽거나 영화, 드라마를 챙겨보고 밀린 글을 쓰기도 한다. 날이 밝아올 즈음, 남편이 운동하러 집을 나선다. 다시 고요한 시간이 꽤 흐른 뒤, 늦잠을 실컷 잔 아들이 꼼지락거리면 이제 나도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떴고 시곗바늘도 아침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아침과 점심을 대충 합쳐 '아점'으로 해결해도 크게 문제없을 시간이다. 무엇을 먹을까 매일 해도 뾰족한 수 없는 고민이지만 토요일 아침엔 그 고민마저 살짝 가볍게 느껴진다.

자주 해 먹는 아점 메뉴는 떡만둣국이다. 준비는 간단해도 든든한 한 끼로 충분한 떡국은 쫄깃한 식감 덕분에 아이의 사랑을 받는 단골 메뉴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남쪽 지방에서는 육류보다 다시마 푼 멸치육수를 자주 쓴다. 시판 육수들이 잘 나와 있지만 국물 요리를 할 때는 즉석에서 다시마와 멸치육수를 내는 것을 선호한다. 고온에서 급히 우리면 쓴맛이 나기 때문에 저온에서 천천히 육수를 낸다.

그동안 냉동실에서 꺼낸 떡국 떡을 물에 불려두고, 만두도 꺼내둔다. 채소 보관함에 들어 있는 애호박과 버섯을 꺼내 씻어 썬다. 여유가 있을 때는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달걀 지단을 부치기도 하지만 보통은 젓가락으로 휘휘 저은 달걀물을 쓱 부어 끓인 후 불을 끄고 그릇에 담는다.

설날에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던 떡국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지. 하지만 주부에게 더 좋은 건 역시 남이 만들어 주는 음식이다. 마침 대학가 근처의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어서 다양한 아점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가성비 괜찮은 브런치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 아이의 기분에 따라 주로 메뉴가 정해지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토요일의 아점은 지하철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미역국 정식집에서 먹는 밥이다.

미역국도 떡국과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직접 요리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만, 이젠 미역국만 파는 식당도 생겼다. 흔히 접하는 소고기미역국은 물론, 전복미역국, 가자미 미역국 등 다양한 미역국과 깔끔한 반찬을 곁들여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미역국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아점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주말이라고 해도 주부에게는 늘 할 일이 밀려있기 마련이다. 거기에 시가를 방문하는 등 정해진 일정이 있으면, 미뤄둔 빨래나 청소를 해놓고 외출 준비를 하느라 아침부터 시간을 계산하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미역국을 먹으러 가는 날은 딱히 챙겨야 할 것 없는 무계획의 날이다. 그런 날 날씨까지 도와주면 우리 셋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집 앞을 흐르는 하천 산책로를 따라 나와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남편은 조금 빠르게 걷거나 가볍게 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목적지인 미역국 집을 향해 각자의 속도로 달린다. 바람을 가르는 시원함과 약간의 속도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한창 자전거 타기에 재미가 들린 아이가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속력을 내 보다가 아빠가 뒤처지는가 싶을 때 즈음 갔던 길을 돌아온다.

하천을 따라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풀들과 풍경도 관찰한다. 운 좋은 날에는 하천에서 유유자적 놀고 있는 오리들이나 왜가리를 만나기도 한다. 식당 방향인 상류 쪽에는 종종 수달도 보인다던데 아직 마주치지 못했다. 하천 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생태교육장으로 변한다.

밥을 먹는 게 목적이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 자체의 여유로움과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주말이 그리 쉽게 허락되지는 않는다. 생활인으로서만 아니라 부모 노릇이나 자식 도리, 사회생활 등을 하느라 주말의 시간도 늘 크고 작은 계획과 약속들로 꽉 차게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미역국 정식집에 가는 날은 딱히 챙겨야 할 것도, 놓치거나 잊어버려서 곤란한 일도 없는 여유로운 호사를 누린다. 비어 있기에 다른 무언가를 마음껏 채울 수도 있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 우리 셋은 서로의 속도를 맞춰가며 같은 방향을 향해 천천히 나간다.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
 
▲ 여유만만 토요일의 점심 모처럼 아무 계획없는 토요일, 가족과 함께 하는 여유만만 점심
ⓒ 박은정
 
드디어 식당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나란히 대 놓고 가게로 들어섰다. 소고기미역국 하나, 가자미 미역국 하나를 주문했다. 좋아하는 홍합 미역국이 메뉴에 없어서 아쉬웠지만, 가자미 미역국이 고소했고 미역도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아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서비스로 주는 다방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부른 배에 천천히 걷는 남편의 보폭에 맞춰 페달을 밟았다. 먼저 가려는 자전거 탄 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해 주면서. 든든하게 먹어 에너지 넘치는 아이만이 저만치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서로를 챙기며 돌아가는 길 앞에 행복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한 끼를 잘 넘겼다는 안도감에 이어 모처럼 여유롭게 바깥바람을 쐬며 함께 하는 시간 그 자체로 가슴 가득 충족감이 차올랐다. 밥 한 끼를 먹으러 나선 길이지만 단순한 밥 한 끼만은 아닌 특별한 토요일의 점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집안에서는 자꾸만 집안일, 각자의 관심사로 여기저기 정신을 빼앗기기 일쑤다. 더군다나 평일 저녁 시간은 회사나 학교에 가기 위해 다음을 정비하는 시간에 가깝다.

가족 간의 대화도 행동도, 자꾸만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내일 행복하기 위해 너무 자주 오늘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감을 미뤄두고 행복의 조건들을 채우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에 가끔 허락되는 여유로운 한 끼를 그냥 흘려보내기는 더욱 아쉽다. 어디 멀리 나가지 않아도 집 근처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 계절이다. 몸은 가볍게, 시간은 조금 여유롭게 챙겨 가족 또는 연인, 친구들과 손을 잡고 나서 보자. 

느긋한 마음의 여유와 맛있는 식사의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한 끼. 빡빡한 일상 속, 나와 주변을 한번 돌아보며 심호흡할 수 있는 시간. 이번 주말은 이런 아점 한 번쯤 계획해 보면 어떨까?

《 group 》 우리들의 점심시간 : http://omn.kr/group/lunch_time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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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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