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가이를 위한 시계 설명서(1)

시계와 자동차는 여러 면에서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두 제품 모두 초기에는 귀족이나 부유층이 사용하는 물건이었으며, 첨단 기술이 집약된 고급 제품이라는 점에서 사용보다는 감상의 대상, 곧 예술품으로 간주된다. 

1천만 원이 넘는 시계나 1억 원을 호가하는 고급 자동차는 실용 목적보다는 과시의 수단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실제 심해 다이빙에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며, 포르쉐 911을 구매해 서킷에서 기록 경신을 위해 사용하는 소비자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감상 정도로 끝나는 게 일반적이다.

자동차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시계에도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여러 매체나 시장 조사에서도 언급된다. 아반떼를 타고 휴대전화의 시계 기능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포르쉐나 롤렉스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소셜미디어에서는 롤렉스 착용 인증 사진을 수입차 운전석에서 촬영하는 일이 흔하며, 이런 트렌드를 시계 브랜드들도 인지하고 있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은 자사의 제품을 자동차와 연계해 소비자에게 더 큰 상징성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자동차가 시계보다 훨씬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계 브랜드들이 자동차 문화에 '편승'하려는 전략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접근이다. 예컨대 포르쉐를 좋아하는 소비자라면, 포르쉐와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브랜드인 태그호이어의 시계를 선택할 수 있다.

<포르쉐 이코넨에 전시된 호이어 랠리그래프 시스템>

이런 이유로 포르쉐와 관련된 전시회에 태그호이어가 참가해 시계를 함께 전시하거나, 포르쉐 오너를 위한 잡지에 광고를 게재하는 사례가 종종 목격된다. 태그호이어의 공식 웹사이트에 게시된 모터스포츠 후원 기사에 페라리 대신 포르쉐 관련 이미지가 주로 사용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스티브 맥퀸의 전설

포르쉐의 브랜드 헤리티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라면, '걸프 레이싱(Gulf Racing)'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걸프 레이싱은 포르쉐의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걸프 레이싱이 없이 포르쉐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걸프 레이싱이 빠진 포르쉐는 디카페인 레드불과도 같은데, 포르쉐가 내세우는 모터스포츠 헤리티지에서 가장 대중적이며 핵심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유사인 걸프 오일은 1937년부터 레이싱 팀을 후원하였으며, 1960~1970년대 르망 24시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하늘색과 오렌지색 스트라이프가 조합된 리버리 컬러는 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에도 '컬트적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비록 걸프 오일은 1984년 쉐브론에 합병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해당 컬러와 로고는 여전히 강한 인상을 남기며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걸프 레이싱의 상징성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데에는 1971년 개봉한 스티브 맥퀸 주연의 영화 '르망(Le Mans)'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맥퀸은 이 영화에서 걸프 레이싱 소속 드라이버인 마이클 델라니를 연기하며, 포르쉐 917을 타고 페라리 512와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주인공이 최종적으로 우승을 거머쥐지 않고, 팀 동료가 포디엄에 오르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결말은 전통적인 할리우드식 구조를 따르지 않았기에 더욱 긴 여운을 남겼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스티브 맥퀸은 오히려 전설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알겠지만 걸프 레이싱의 스트라이프와 함께  그의 오른손에는 태그호이어 모나코 크로노그래프가 있었다.

그냥 우연의 연속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에 태그호이어가 후원사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맥퀸은 실제 레이싱 현장의 사실감을 살리는 것을 중시했고, 실제 스위스 드라이버인 조 시페르트가 착용했던 레이싱 수트를 참고해 영화 속 의상으로 선택했다. 해당 수트에는 큼지막한 태그호이어 로고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고, 시계 역시 자연스럽게 호이어 제품이 되었다.

그가 선택한 시계는 호이어 모나코 모델로, 모델 번호는 1133, 청색 다이얼을 지닌 제품이었다. 이 시계는 특별히 제작된 것이 아닌, 누구나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일반 모델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영향으로 이 시계는 이후 '스티브 맥퀸의 시계'로 불리며 상징성을 얻게 되었다.

태그호이어가 포르쉐 아이콘이 된 이유

현실에서 걸프 레이싱 팀은 1971년과 1972년 르망 24시에 포르쉐 917로 출전했으나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반면 해당 경주차들은 스티브 맥퀸의 이미지와 영화의 영향으로 인해 오히려 우승차보다 더 큰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맥퀸이 실제로 착용했던 호이어 모나코 Ref. 1133B은 2020년 뉴욕에서 열린 경매에 2,208,000 달러에 낙찰되었다. 이 시계는 맥퀸이 그의 정비사였던 헤이그 알투니안에게 선물한 것으로, 그가 직접 착용한 두 점의 시계 중 하나로 알려졌다. 

태그호이어 모나코는 본래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시계가 아니었으며, 초고가 럭셔리 제품도 아니었다. 오히려 롤렉스 데이토나, 오메가 스피드마스터와 같은 모터스포츠 전문 시계들과 비교하면 인지도 면에서 하위에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 맥퀸이 착용한 시계'라는 상징성 하나로 지금은 이들과 동등한 상징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계를 구입하는 소비자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포르쉐라는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강한 경우, 둘째, 영화와 스티브 맥퀸의 전설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경우, 셋째, 단순히 시계의 외형이 마음에 드는 경우이다. 무엇보다 "이 시계는 스티브 맥퀸과 함께한 전설적인 모델입니다."라는 설명은 소비자의 구매를 이끄는 결정적인 문구로 작용한다.

영화의 전설화 이후, 태그호이어는 모나코 모델의 다양한 스페셜 에디션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걸프 레이싱 컬러 에디션, 맥퀸이 입었던 수트를 모티브로 한 스트라이프 다이얼 모델, 2005년 스티브 맥퀸 탄생 75주년 기념 에디션 등이 있다.
그러나 정작 영화 속에서 스티브 맥퀸이 착용한 시계는 장식이 없는 기본형 청색 다이얼 모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기본형 모델을 '근본'으로 여기는 소비자들도 존재한다. 또한, 포르쉐 911을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춘 소비자라면, 태그호이어는 비교적 부담 없는 고급 시계 브랜드로 간주될 수 있다.

스티브 맥퀸과는 별개로, 태그호이어는 모터스포츠 이미지에 집중해온 브랜드다. 포뮬러 원, 카레라, 실버스톤, 모나코, 몬자 등과 같은 제품명은 자동차 애호가라면 익숙한 명칭이며, 동시에 태그호이어의 주요 시계 라인 업 이름이기도 하다.

카가이에게 추천하는 시계는?

시계에 큰 관심이 없었던 소비자라 할지라도, 이 글을 접하면서 멋진 시계를 하나쯤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다. 실제로 시계에 입문하려는 소비자들로부터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어떤 시계를 추천하시나요?"다.

시계와 자동차는 공통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무난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모델'이 결국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스티브 맥퀸 역시 평소에는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난하면서도 멋스러우며, 어느 자리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시계를 찾는다면 롤렉스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추천 대상이다.

다만, 태그호이어 모나코를 고려한다면 상태가 좋은 중고 제품을 구입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추천 색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근본'이라 불리는 청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