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친’ 김호령과 홍원빈, 야구는 낭만이다

지난 2월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함께 뛰는 순간을 그렸던 김호령과 홍원빈. /김여울 기자

야구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다.

희로애락이 어우러진,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는 드라마. 6월 3일 잠실구장에서 또 다른 KBO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마치 두 사람이 극본이라도 쓴 것처럼 펼쳐진 장면, 감동이 더해진 해피엔딩으로 끝난 1화.

KIA 투수 홍원빈과 외야수 김호령이 주연이 된 드라마였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잘하고 싶어서” 타격 훈련하다가 옆구리 부상을 당한 김호령. KBO를 호령한 수비 실력에도 타격 방황을 하면서 애를 태운 선수.

195㎝의 키와 150㎞가 넘은 공을 가지고 있지만 제구 약점에 막힌 홍원빈. 2019년 1차 지명 선수로 기대감 속에 시작했지만 프로 데뷔를 하지 못한 7년 차 선수.

투수와 외야수로 포지션도 다르고 나이도 8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가장 친한 동료로 꼽는다.

‘성실함’으로 통한 두 사람, 지난 3월 그들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미국 어바인에서 진행된 1차 스프링 캠프 명단에 없었던 두 사람은 나란히 오키나와 캠프로 콜업됐다.

많은 게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누구나 알아주는 성실함으로 두 사람은 룸메이트가 돼 이를 갈았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오키나와로 건너왔다.

“후회 없이 하자”는 생각으로 연습경기에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홍원빈의 공은 하늘로 향했고, 김호령은 수비에서도 아쉬운 실수를 했다.

지난 3일 두산과의 원정경기에서 3안타를 기록한 김호령. <KIA 타이거즈 제공>

우승 멤버들이 버티고 있던 라인업에 두 사람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글 같은 그라운드에서 그들의 자리가 생겼다. 외야에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김호령이 기회를 얻었다.

한 차례 짧게 1군을 다녀갔던 김호령은 5월 15일 위기의 외야에서 다시 이름이 불렸다.

5월 17일 두산과의 더블헤더 경기에 모두 나와 연달아 2루타를 기록했던 김호령은 세 번째 안타도 2루타로 장식했다.

5월 28일 키움전이 끝나고 나서는 “멀티히트가 너무 하고 싶었다. 기분이 좋다”라면서 웃었다.

뭐라도 붙잡고 싶던 순간, 이범호 감독의 ‘원포인트 레슨’이 김호령에게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뒷다리가 빠져 있고, 칠 때 골반도 빠지고 하니까 감독님께서 반대로 크로스해서 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해봤다. 그전에도 말씀해 주셨는데, 못하다가 해봤는데 타석에서 뭔가 잡혀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연습할 때는 조금 어색했는데 잘 안되니까 뭐라도 해봐야하는 상황이다. 감독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 해봤는데 괜찮았다.”

변화를 받아들인 김호령은 3일 두산전에서는 시즌 첫 3안타 경기도 선보였다.

2023년 5월19일 광주 키움전 이후 746일 만에 기록된 김호령의 3안타, 그냥 3안타가 아니었다.

김호령과 홍원빈이 그리던 장면을 현실로 옮겨 놓은 ‘복선’이 됐다.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포즈를 취한 김호령과 홍원빈. /김여울 기자
간절하게 기다리는 1군 데뷔 날, 홍원빈은 중견수 자리에 있는 김호령과 눈을 마주치는 장면을 그린다. 김호령은 최선을 다해 공을 향해 달릴 것이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김호령이 공을 쫓아가는 모습. 두 사람이 꿈에서도 그리는 장면이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상상하는 장면을 이야기했었다.

7년을 기다린 순간 홍원빈은 중견수 자리에 있는 김호령을 보면서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김호령은 그런 홍원빈 뒤에서 어떻게든 공을 잡겠노라고 했다.

지난 3일 두산과의 원정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른 홍원빈. <KIA 타이거즈 제공>

KIA 불펜에도 대란이 발생했다.

부상자가 나왔고 남아있는 선수들은 부진의 봄날을 보냈다. 5월과 함께 콜업이 준비됐었지만 홍원빈은 담 증세로 기다렸던 데뷔전을 미뤄야 했었다.

일찍 홍원빈의 무대가 찾아왔다면 김호령이 그의 뒤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홍원빈이 ‘30번’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1군에 왔고, 마운드에 올랐다.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준비했던 것들을 보여줄 수 있도록 고심을 했던 KIA 입장에서는 11-2로 앞선 9회말이 홍원빈을 투입하기에 최상의 장면이었을 것이다.

김호령은 3안타를 터트리면서 대량 득점의 발판이 됐다. 결국 김호령의 3안타가 홍원빈을 잠실 마운드로 불러냈다.

홍원빈이 마운드에 올랐고, 그의 뒤에는 김호령이 있었다. 홍원빈은 약속했던 손짓을 하면서 김호령과 눈을 마주쳤다.

생각했던 장면 그대로 그라운드가 세팅됐고, 그들의 또 다른 상상이 이내 현실이 됐다.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줬던 홍원빈이 이선우를 마주했다.

2구째 이선우의 방망이가 움직였고 공은 외야로 뻗어나갔다.

중견수 김호령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홍원빈의 인생 첫 아웃카운트를 만들어줬다.

이후 안타와 희생플라이로 1실점은 했지만 홍원빈은 김인태를 상대로 4구째 스탠딩 삼진을 잡고 7년을 준비한 자신의 야구 드라마 1화를 마무리했다.

삼진으로 경기를 마무리한 뒤 관중석을 보는 홍원빈. <KIA 타이거즈 제공>

홍원빈은 경기가 종료된 뒤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연호하는 팬들을 올려봤다.

“팬분들이 환호하는 게 들렸다. 머릿속에 상상만 했던 상황이었다. 그걸 눈으로 실제로 담고 싶었다. 저절로 팬분들을 보게 됐다. 몸 풀 때부터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긴장은 하나도 안 됐다. 야구장이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마운드에 올라가니까 엄청 조용했다. 몰입이 잘 돼서 포수만 보고 던질 수 있었다.”

약속된 김호령과의 사인도 홍원빈에게는 자신감이 됐다.

홍원빈은 “초구 던지기 전에 호령이 형과 손짓하자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고 나니까 긴장도 안 됐다”고 말했다.

오히려 지켜보는 김호령이 긴장했다.

한국시리즈까지 경험해 본 김호령이지만 자신의 데뷔전처럼 떨렸던 9회말이었다.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 원빈이 나오면 같이 보면서 손 한번 들자고 했었다. 원빈이가 던지는 데 내가 더 떨렸다. 그래서 최대한 집중해서 다 잡으려고 했다.”

시작은 볼넷이었다. 홍원빈은 자신 있었고, 김호령은 걱정을 했다.

홍원빈은 “볼넷 줬을 때 예전처럼 긴장해서 내 몸이 뜻대로 안 돼서 준 것은 아니었다. 가운데 던지려고 했는데 뭔가가 안 맞았다. 흔들릴 틈 없이 똑같이 던지자고 했던 게 결과가 나왔다”고 이야기했고, 김호령은 “초구 던졌을 때는 ‘와 됐다’했는데 원빈이가 흔들렸다. 볼넷 줬을 때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해보자’라고 했는데 아웃카운트 잡으니까 마음이 놓였다. 첫 아웃카운트를 내가 잡아줬다. 최대한 빨리 뛰어가서 잡았다”라고 돌아봤다.

마지막 삼진 순간은 완벽했다.

홍원빈은 “투나씽이 되고 슬라이더 사인이 나왔을 때 욕심 났다. 이걸로 삼진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했던 대로 궤적도 완벽하게 들어갔다. 끝나고 나서 ‘이게 되네’,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호령이 형이 잘 해줘서 점수 차가 많이 나고 기회가 왔다. 모든 게 특별했다”고 믿을 수 없는 장면을 이야기했다.

“내가 같이 던진 느낌이었다”며 웃은 김호령은 “마지막 삼진 잡을 때 잘했다고 생각했다. 캠프 때 했던 이야기를 이뤘다. 모든 상황이 다 맞았던 게 신기하고 좋았다. 엄청 신기했다”고 잊지 못할 순간을 회상했다.

3일 데뷔전이 끝난 뒤 김호령과 나란히 승리 세리머니를 한 홍원빈. <KIA 타이거즈 제공>

꿈같은 밤을 보낸 홍원빈은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떴다. 간절했던 노력이 현실이 됐고,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세상.

“아침에 눈을 떴는데 조금 더 활기차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이 무대만 보고 ‘언제 올까?’라면서 먼 미래 생각하듯이 했는데 그걸 해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달랐다. 포기 안 하면 다 할 수 있구나 싶으니까 모든 행동에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너무 행복하다. 호령이 형하고도 ‘말하는 대로 잘 된 것 같다’고 경기 장면들을 이야기했다.”

드라마가 매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는 없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긴장 관계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첫 장을 열었다는 게 중요하다.

많은 고난을 딛고 오랜 준비 끝에 시작된 드라마, 홍원빈은 이제 진짜 주인공을 꿈꾼다.

홍원빈은 “불펜에 있으면 필승조와 패전조가 나뉜다. 지금은 패전조여도 감사하지만 필승조가 몸 풀고 나가는 게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 멋있는 모습들을 나도 하고 싶다”며 “자신 있게 삼진을 잡으려고 하겠다. 중요한 순간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호령도 기다렸던 기회를 놓칠 순 없다.

평범한 등장인물에서 벗어나 홍원빈과 또 다른 에피소드를 써내려 가고 싶은 바람이다.

김호령은 “운도 좋기도 했고, 3안타를 치면서 너무 좋았다. 상위 타순 올라가면서 다 쳐주니까 더 좋았다. 뭔가 욕심은 안 부리고 지금처럼만 매일 하나씩만 치자는 마음으로 하려고 한다”며 “지금처럼만 원빈이가 던져주고, 나도 안 다치고 역할을 하면서 시즌 끝날 때까지 1군에서 같이 가고 싶다”라고 기대하는 결말을 이야기했다.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