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산업의 시작은 이 남자 손에서 이루어졌다는데...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
박정희 전 대통령 사돈
IMF 이후 계열사 5개 축소
과거 일제하 지방 금융 조합 직원에서 출발한 한 기업인은 단성사, 중앙극장을 비롯한 전국 영화체인망을 장악해 한때 ‘영화광’으로 불리며 재계에 이름을 알린다. 극장의 제왕서 건자재·건설업으로 재계 순위 30위권 안에 들었던 회장님은 벽산그룹의 김인득 회장이다.
당초 벽산그룹의 창업주인 김인득 회장은 견실한 기업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는 그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라는 일념으로 사업을 시작해, 일생을 “기업가는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원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김인득 회장은 1934년 학교 추천으로 마산의 내서금융조합에 입사해 조합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아내와 별거까지 감수하면서 규정과 실무 숙달에 열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노력을 통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거듭난 뒤 내서 금융조합의 핵심 직원이 된다. 다만, 결핵 3기 진단을 받은 뒤 휴직원을 내고 귀향하여 투병 생활을 거쳐 건강을 회복해 금융조합 생활을 청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부산으로 가게 된 김인득 회장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불이 전기회사 사장인 재일교포 이현수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이현수는 사재를 털고 빚을 내어 부산의 큰 극장들을 인수해 친척과 직원들에게 위탁 경영했는데, 좌경 세력이 개입하여 극장 쟁탈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실무책임자가 구속되고 이현수 역시 구속되는 등 극장이 타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김인득 회장은 이현수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진주의 집을 팔아 그를 석방하고 그의 재산도 되찾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석방 이후 이현수는 김인득 회장에게 을 합쳐 극장 사업을 하자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시기가 광복 직후였기 때문에 오락시설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기에 일반 대중에게 건전한 휴식 공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에 요청을 수락한 김인득 회장은 사장, 경리, 선전 등 모든 업무를 도맡다시피 하며 극장 운영을 위해 전력을 쏟았다. 김인득 회장이 국내 극장을 운영하고 있을 당시 이현수가 운영하는 불이 무역 역시 일본에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불이 무역은 1950년 미국의 8대 영화사를 한 손에 쥐고 외국 영화 수입을 독점하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김인득 회장은 이현수와의 제휴를 통해 무역과 영화 수입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다만, 이런 김인득 회장의 사업 추진은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아닌 전쟁에 시달린 국민들을 위한 사업이라는 사명감에서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시기상 극장에 걸리던 외국 영화가 일제 강점기에 들여온 탓에 일본어 자막을 뭉갠 후 상영하는 낡은 영화가 대부분이어서 우리말 자막을 넣은 새 외화는 인기를 끌었다. 이에 김인득 회장은 화 수입 사업 1년 만에 20여 편의 외화를 수입하면서 직원도 20여 명으로 늘리는 등 전국의 극장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미국 8대 영화사 중 6대 영화사 작품을 독점 배급하게 된 그는 수입 외화를 선정할 때도 명화만을 엄선해서 고객에게 봉사한다는 경영방침을 지킨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그는 영화 사업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찌든 국민의 의식구조를 깨우치는 전기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1951년 설립된 동양물산은 외국영화를 수입·공급하며 입지를 키워나간 것이다. 김인득 회장은 1953년 단성사 피카디리 중앙극장 등 굵직한 극장을 잇달아 인수해, 1958년 전국 100여 개에 달하는 체인망을 구축하면서 “영화광”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영화광으로 이름을 떨치던 김인득 회장은 1962년 한국 슬레이트 공업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사업의 포커스를 제조업으로 옮겼다.
당시 60~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농어촌 개량 작업이 붐을 이루면서 슬레이트 사업을 통해 번창 일로를 걷게 된 그는 한국 슬레이트 공업 주식회사에 건설사업부를 발족하면서 건설업을 본격화했다. 당시 한국 슬레이트 공업의 건설사업부는 3년 만에 시공 능력 33위에서 11위에 오를 정도로 덩치가 커지며 한국건업 주식회사로 떨어져 나와 지금의 벽산건설로 거듭났다.
벽산그룹은 본격적으로 60년대 말부터 회사를 끊임없이 인수·합병하는 등 사세를 키워가며 그룹의 면모를 갖춰왔다. 다만, 이런 벽산의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는 유통 금융 방송 지하자원개발 등 전체 18개에 달하던 계열사는 IMF 이후 구조조정을 겪으며 현재 5개로 줄었기 때문이다.
당초 벽산그룹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사돈 관계를 맺은 1970~80년대에 벽산그룹은 승승장구의 성공 가도를 달렸으나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부도 위기에 시달렸고 2002년 워크아웃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 따르면 1972년 김인득 창업주의 둘째 아들 김희용 동양물산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의 셋째 형 상희 씨가 낳은 조카인 설자 씨와 결혼한 것으로 전해졌다.
IMF의 위기를 견디지 못한 벽산그룹은 1976년 설립한 건축 내외 장제 벽산산업개발을 인희에 합병하고, 1985년 설립된 벽산 쇼핑은 1999년 매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1989년 인수한 정우개발, 동부 해양도시가스도 1999년 매각됐고, 금융업 진출을 위해 인수했던 유신상호신용금고도 정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벽산그룹의 워크아웃 졸업 이후 지난 2004년 장남인 김희철 회장이 출자전환이 된 채권단의 주식을 사들여 회사를 되찾았고, 이후 김희철 회장 일가와 김희용 일가가 주식을 교환하면서 독립 경영 체제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김희철 회장 일가는 벽산건설과 벽산을, 김희용 부회장 일가는 동양물산 지분을 가지면서 동양물산은 벽산그룹에서 계열에서 분리해 별도의 기업 집단으로 거듭났다. 한때 영화광으로 불리며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업을 영위해 온 김인득 회장은 1991년 장남 김희철 회장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 1997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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