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서 번 돈 다 날렸다" 32살에 이혼 후 세딸 홀로 키우고 치킨집 알바중인 박치기왕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할 수 있을까.

한때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프로레슬러 노지심.

김일, 이왕표의 뒤를 잇는 ‘박치기 왕’이자 극동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그는 지금, 하남의 작은 통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닭을 손질하고, 바닥을 닦고, 길을 잃어버린 채 배달을 다니는 인생 2막.

하지만 그를 단순히 ‘과거의 스타’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지금도 매일 아침, 다시 링 위에 서기 위한 훈련을 멈추지 않고 있다.


노지심은 어린 시절, 흑백 TV로 김일의 경기를 보며 감동을 받았다.

박치기 한 방에 쓰러지는 외국 선수들을 보며 ‘나도 저기 서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16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김일의 문화생이 되어 구슬땀을 흘렸고, 결국 김일, 이왕표를 잇는 선수로 성장한다.

파괴력 넘치는 박치기로 수많은 경기를 제압하며 ‘제2의 김일’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극동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까지 올랐다.

1980~90년대,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의 오락거리였다. 김일의 후계자로 불리던 노지심은 방송, 광고, 영화까지 섭렵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때는 부러운 게 하나도 없었어요. 강남에 빌딩 한 채쯤은 있었죠.”

레슬러였지만 동시에 연예인이기도 했던 시절. 스포트라이트는 매일같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링 위의 그의 박치기에 열광했다.

프로레슬링 인기가 점차 사그라지자 그는 체육관을 열고,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귀가 얇았고, 융통성도 부족했다고 털어놓는다.2차 사업, 채권 투자,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결과는 빚뿐이었다.

결국 운영하던 체육관마저 문을 닫게 됐다.

“맞아서 번 돈을 다 날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무모했는지 모르겠어요.”

서른둘이었을 무렵, 아내와 이혼했다.

운동을 싫어하던 아내, 전국과 해외를 돌아다녀야 했던 그의 직업.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혼 후에는 세 딸을 홀로 키웠다. 급식이 없던 시절, 도시락을 싸주며 새벽을 시작했다.

“딸들한테는 미안하죠. 아빠 역할 많이 못 했어요.”

지금도 딸들은 매일 전화를 걸어온다. “약은 먹었어?”, “계단 조심해.” 그 말 한마디가 그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모든 것을 잃은 후,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일터로 나섰다.

하남의 한 통닭집.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잇는다.닭을 손질하고, 서빙을 하고, 때로는 직접 배달까지 나선다.

하지만 길치라 골목에서 길을 헤매는 일이 다반사. 결국 전화로 길을 묻고, 식어버린 치킨을 들고 허겁지겁 찾아간다.

“운동만 하던 몸이라, 이런 일은 정말 어렵더라고요. 허리도 아프고, 종아리도 아프고, 진짜 이를 악물고 버텼죠.”

노지심은 지금도 새벽이면 양평의 집을 나와 산을 오르고, 체육관에서 기술을 연마한다. 무릎은 늘 붓고, 통증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올해 10월, 은퇴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다. “인생을 링에서 마무리하고 싶어요. 정말 한 번만 더 박치기를 하고 싶어요.”

그의 제자, 김민호 선수도 훈련장에 찾아와 함께 땀을 흘렸다. 16년째 인연을 이어온 두 사람.

김민호는 현재 극동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이다.

“스승님은 단순히 기술만 가르쳐주신 분이 아니에요. 인생을 보여주신 분이죠.”

은퇴 경기를 앞두고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고 이왕표가 잠든 봉안당. 생전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둘은 바늘과 실 같았다.

“형님은 은퇴식은 했지만 경기는 못 하셨잖아요. 이번엔 제가 그걸 해드리겠습니다. 힘 좀 주세요.”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속삭였다.

“노지심이라는 사람, 아직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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