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생산적 금융 기조를 본격화하면서 은행권에서 기업대출 확대를 약속하는 풍경은 하나의 관례처럼 굳어졌다. 혁신기업 지원, 전략산업 육성, 성장 동력 확보 같은 표현도 반복된다.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 전략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 자금의 흐름은 이러한 구호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최근 기업대출 증가 흐름을 보면 무게 중심은 대기업 쪽으로 기울었다.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의 대기업 대출잔액은 171조9793억원으로 1년 전보다 5.9% 늘었다. 같은 기간 중소기업 대출은 562조4385억원으로 1.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방은행의 변화는 더 선명하다. 5대 지방은행(부산·경남·전북·광주·제주)의 대기업 대출은 10조810억원으로 1년 새 22% 뛰었다. 중소기업 대출은 88조3476억원으로 2% 늘었다. 지역기업 밀착 영업을 해온 지방은행조차 대출 포트폴리오의 무게를 대기업 쪽으로 조정하고 있다.
이 현상을 단순히 경기 둔화나 영업 전략 변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문제의 본질은 '자본 규제'에 있다. 보통주자본비율(CET1)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해야 하는 환경에서 은행은 위험가중자산(RWA)을 관리해야 한다. 신용등급이 높은 우량 대기업 여신은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가중치(RW)를 적용받는다. 같은 금액을 취급해도 RWA 증가 폭이 작아 자본 적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다.
여기에 순이자마진(NIM)이 줄어들면서 위험가중자산 대비 수익률(RORWA)의 중요성이 커진 것을 고려하면 은행으로서는 자산을 확대하되 자본 소모가 적은 대기업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연체율 격차도 계산에 반영된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대기업 대출 연체율은 0.16%, 중소기업은 0.89%다. 이는 같은 금액을 빌려주더라도 중소기업 대출의 충당금 부담이 대기업보다도 크다는 뜻이다.
결국 은행은 계산기를 두들릴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더욱 문제는 이 계산식이 규제에 의해 설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 바젤 체계는 RWA를 기준으로 자본을 요구한다. 담보가 부족하거나 신용등급이 낮은 차주에 대한 여신은 높은 위험가중치를 적용받는다. 중소기업과 혁신기업 대출이 정책적으로 필요하다는 점과 별개로 자본 규제 구조는 은행에게 보수적 판단을 유도한다.
금융당국도 이런 구조적 제약을 모르지 않는다. 혁신기업·전략산업 지원을 위해 RW 조정 가능성, 자본규제의 탄력적 적용, 정책금융과 민간은행의 리스크 분담 확대 필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경기 대응 차원의 감독 유연성도 거론됐다. 그러나 발언과 실제 제도 변화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현행 규제 체계가 유지되는 한 은행의 계산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흐름이 이어지면 산업 구조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 담보 여력이 부족한 기술 기반 기업이나 지역 제조업체는 은행 문턱을 넘기 어려워진다. 은행을 대체할 금융기관으로 이동하면 조달 비용이 올라간다. 투자 시점은 늦어지고 규모는 줄어든다. 이러한 결과로 중소기업의 성장 체력이 약화되면 장기적으로 산업 생태계의 허리가 얇아질 수 있다. 생산적 금융이 특정 대기업 프로젝트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정책 취지도 왜곡될 수 있다.
생산적 금융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면 제도 설계를 손봐야 한다. 위험가중치 조정, 특정 산업에 대한 한시적 자본 부담 완화, 정책보증과 민간자본의 공동 구조 설계 같은 구체적 장치가 필요하다.
은행에게 더 많은 위험을 감내하라고 요구하면서 자본 규제는 그대로 두는 방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건전성이라는 목표와 성장 지원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규제 설계의 미세 조정이 아니라 방향 조정이 필요하다.
올해 안에 가시적인 규제 조정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생산적 금융은 헛구호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기업대출 통계는 하나의 신호다. 은행의 전략을 묻기 전에 제도의 설계를 다시 들여다볼 시점이다. 생산적 금융을 말한다면 규제부터 손봐야 한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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