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간 지연된 정의…‘1980년 광주’ 한달 전 사북에선 무슨 일이?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
신군부가 계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해 나가던 1980년 4월21일 오후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소재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분노에 찬 광부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는 광부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1979년 4월 대의원 간접선거로 진행된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고, 결국 무자격 대의원이 투표한 사실이 확인돼 ‘선거무효’ 결정이 내려졌으며 5명의 직무대리가 연속 교체되는 등 노조 파행이 이어졌다. 이에 노조원 2000여명은 지부장 직접선거를 요구했지만 경찰과 정보기관 등의 방해로 결국 지부장 직선제는 무산됐다. 여기에 1979년 12월 광산노조가 임금인상 요구안 42.75%를 결의했지만, 당시 어용노조라고 비판을 받던 동원탄좌 노조의 지부장 직무대리는 일방적으로 회사 쪽과 ‘3월부터 20% 임금 인상과 탄가 인상 시 재조정’을 합의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노조원 20여명은 1980년 4월16~17일 서울 광산노조 사무실을 점거하고 노조지부장 직선제 실시를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하는 등 갈등이 표면화됐다. 이후 경찰이 4월21일 오후 노조집회를 허용하겠다는 각서까지 썼지만 결국 이 집회마저 계엄당국에 의해 불허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노조원들은 지부장 면담을 요구하며 거세게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때 현장에서 동향을 사찰하던 사복 경찰이 광부들에게 발각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경찰은 황급히 차를 타고 도망쳤고, 이를 가로막는 광부 원일오씨 등 3~4명을 치고 그대로 달아났다. 경찰 차량 바퀴에 깔려 널브러져 있는 동료들의 처참한 모습을 본 광부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이 소식은 곧 퇴근하던 광부들에게 퍼져 나갔고, 이들은 곧바로 사북파출소로 몰려가 집기를 파괴하고 경찰을 몰아낸 뒤 사북 일대를 장악했다. 다음날 노조 지부장의 집으로 쳐들어간 일부 광부와 부녀자들은 지부장을 찾지 못하자 그의 아내를 대신 붙잡아 인질로 삼고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은 인력을 총동원해 진압을 시도했지만 광업소 길목인 안경다리에서 극렬한 저항에 막혀 오히려 경찰 1명이 숨지고 70여명이 다치는 피해를 입었다.
신군부가 공수부대 투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광부들은 오히려 화약창고와 무기고까지 장악하는 등 결사항전의 태세를 보이자 강원지사 등이 현장에 내려와 뒤늦게 협상에 나섰다. 사건 발생 나흘 만인 4월24일 광부들은 노조직선제를 포함한 11개 항에 대한 당국의 약속을 받아내고 ‘절대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고 모두 해산했다.
하지만 광부들을 기다린 것은 공권력을 동원한 잔인한 보복이었다. 합동수사단을 꾸린 신군부는 5월6일 협상 지도부를 가짜 회의에 소집해 소총을 앞세우고 연행한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광부들을 잡아갔다. 당시 광산 사택 일대는 새벽마다 쫓고 쫓기는 고함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5월8일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연행된 여성(고 이명득씨)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까지 통제하던 신군부는 공권력이 촉발한 이 사건을 지부장 부인 폭행과 광부들의 폭력 난동에 맞춰 보도하도록 했다.

참혹했던 집단 고문의 현장
신군부는 다른 사람 이름을 말할 때까지 고문하는 식으로 광부 마을 공동체를 파괴했다. 돌아온 광부와 그의 아내 등은 이웃을 고발한 죄책감 혹은 이웃에게 고발당한 원망 등의 상처를 안은 채 상당수가 사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200여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이 영장 없이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며, 이 가운데 28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돼 유죄판결까지 받았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약 한달 전에 발생한 사북사건 관련자들은 오랫동안 ‘폭도’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다.
무혐의로 풀려난 사람들도 국가가 자행한 고문 등 폭력 행위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고문을 당했다는 소리를 하면 다시 잡아들이겠다는 협박 탓이었다. ‘고문-허위진술-고문’을 반복적으로 겪은 광부들은 침묵했다. 가혹한 성적 학대를 받은 여성들은 ‘다시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 싫다’는 이유로 만남조차 거부하고 있다.

20년 걸린 국가폭력의 증언
사북사건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0년 이후다.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 등이 이들에게 ‘침묵을 깰 용기’를 줬다.
2000년 9월 이원갑·신경씨 등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 회복을 신청했다. 다음해 9월에는 사건 관련자들이 ‘사북노동항쟁 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기자회견까지 했다. 20여년 동안 ‘폭도’ 혹은 ‘집단 난동’으로 알려진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고, 고문 사실까지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8년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은 체포와 연행, 수사 과정에서 물고문과 구타 등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또 국가의 사과와 피해 보상, 명예회복을 위한 조처 등을 권고했다. 1기 진실화해위의 결정 이후 핵심 관련자들은 재심을 청구해 2015년부터 지금까지 8명이 무죄를 선고받는 등 사북사건은 국가폭력 사건이자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제2기 진실화해위도 ‘사북사건 관련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국가 사과와 피해자 명예회복 조처 및 기념사업을 권고했다.

45년간 지연된 정의
기념식은 해마다 사건이 시작된 4월21일 개최했지만 45주년을 맞은 올해는 국가의 공식 사과를 기다리며 11월21일로 연기된 상태다. 마침 국가폭력의 그늘 아래 가려졌던 사북의 오래된 아픔을 다룬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도 지난달 29일 전국 개봉했다.
피해자들과 정선지역사회연구소, 강원대 통일강원연구원은 ‘1980년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사과를 촉구하는 1000인 성명’과 서명부를 정부에 전달했다. 이들은 지난 9월30일 성명을 발의하고 불과 보름 만에 목표했던 1000명의 서명 동의를 얻었다.
송영훈 강원대 통일강원연구원장은 “권력자들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선량한 국민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북의 국가폭력 사건은 공동체의 집단기억으로 공유되고 전승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은 “국가 사과는 45년 동안 지연된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사북사건 피해자들과 가족·후손들이 아직도 겪고 있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진화위 권고대로 국가의 책임 있는 사과가 필요하다. 국가폭력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겠다고 천명한 이재명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자그마한 일 갖고…” 장애인 혐오 무감각 드러낸 국민의힘
- 나경원, 보수 유튜버 요청에 국회 대강당 대관…유튜버 연합단체 출범식 연다
- “중재 절차 중대 위반”…‘먹튀’ 론스타와 13년 분쟁 끝내
- ‘왜 딸을 건드려’ 김용범 격노…정책실장!!! 세 번 외치자 멈췄다 [영상]
- ‘○○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현수막 게시 못한다
- [단독] 김용현 “야, 무인기 꼭 해야 돼”…합참 본부장 ‘가스라이팅’ 공소장에 적시
- 중-일 외교 협의도 신경전…중 국장, 주머니에 손 꽂고 내려다봐
- 북, 한미 팩트시트에 반발…핵잠에 “핵무장 포석, 핵도미노 초래”
- 한국, 세계 최대 AI 인프라 구축 ‘UAE 스타게이트’ 참여한다
- 제주 쿠팡 야간 기사, ‘아이디 돌려쓰기’로 8일 연속 근무 정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