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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조 문화재 미스터리 여행
보문들이다. 경주 낭산(99m)과 명활산266m) 사이 황금으로 익어가는 들판. 평야라고 부르기에는 아담하고 그저 벌판이라고 하기에는 드넓으니, “꼬랑지에 ‘들’만 붙여 부릅니다”라는 이곳 주민의 명료한 대답처럼 똑 부러지는 지명이 됐다. 들판 혹은 들녘에서 뒤의 한 글자를 빼고.
지난 8일 오전. 낭산 동북쪽 끄트머리에 붙은 황복사지 삼층석탑(구황리 삼층석탑) 앞이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경지에 이르렀다는 여행자들만 안다는 이곳. 자칭 ‘부산 남구에서 온 4총사’라는 70대 여성들이 오자마자 동국대 경주캠퍼스 대학원생이 도착했다. “이맘때 석탑 뒤로 펼쳐진 황금색 보문들이 얼마나 황홀한지요”라며 이들은 들판을 그윽이 바라봤다. 그들은 석탑처럼 오래 서 있었다.
1942년 그 속에서 나온 손바닥만 한 순금 불상 두 좌(座·불상을 세는 단위)가 국보가 되고, 그 자체가 국보가 된 삼층석탑.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 마침 이곳을 찾았던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는 이들에게 “여기를 잘 보십시오. 탑에 새겨진 이 네모반듯한 공간은 무엇을 뜻할까요”라고 물었다. 보문들을 바라보는 탑의 동면 기단 왼쪽 위 직사각형의 홈. 경주 여행 미스터리의 시작이었다. 일행은 단순한 물음이 아닌 걸 직감한 듯 “비밀장치” “숨구멍” 등 기상천외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박 교수는 “신라 석공의 수리, 콩글리시이기는 하지만 지금 말로 하면 A/S 흔적”이라고 밝혔다.
세월 흐르며 땜질 자재 떨어져 홈만 남아
박 교수가 최근 신라사학보에 게재한 연구 논문 ‘신라 석조문화재의 부분 수리 흔적’에 따르면 신라 석공들은 어떤 이유로 파손된 석탑과 비석·불상 등을 깔끔하게 고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들은 파손된 부위보다 더 크게 네모꼴로 절개한 뒤 아교·유황을 섞은 천연 접착제로 같은 석질의 자재를 붙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땜질 역할을 한 자재가 떨어지면서 ‘네모’가 남았다는 것(그래픽 참조). 부산 4총사와 대학원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교수의 설명은 자리를 옮겨 이어졌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안고 있는 낭산 서쪽 너머에 남산이 있다. 남산의 긴 그림자가 탑에 걸칠 듯 말 듯 한 늦은 오후. 오솔길처럼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어르신들이 뭔 일 있어 왔나 한 번 쳐다본다. 그만큼 한갓진 곳에 두 탑이 있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은 다보탑·석가탑처럼 ‘쌍탑’으로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동탑은 모전석탑, 서탑은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서로 건축 양식이 달라 더욱 진귀하게 여겨진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논란이 있다. 건축 시기가 달라 양식이 다른 것이고, 동서 일직선 상에 위치하지도 않아 쌍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 동탑에도 수리 흔적이 있다. 무려 세 곳이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기단에 있다. 기단 네 개 면마다 네 편의 큰 석재가 맞닿아 있는데, 엇갈리게 쌓아 탑의 하중을 분산시키려는 세 면과 달리 정면은 십자(十字)로 물려있다. 이 물린 부분이 터져나갔고, 석공은 급히 A/S에 들어갔다는 게 박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탑 주변 어딘가 땜질에 사용한 석재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런 ‘성형 수술’ 혹은 ‘정형외과적 수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리 기법은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통일신라·보물)에도 그대로 쓰였다고 한다. 원랑선사탑비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월광사 터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진 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어 일반인은 볼 수 없다. 신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금석문이다. 제천 사람들의 소원 중 하나가 이 탑비를 돌려받는 것이라고 할 정도인데, 실제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비석 중간 측면에 가로 17㎝, 세로 47㎝, 깊이 6㎝의 절개 부위가 드러나 있다. 비석이 부러질 것을 우려해 석탑의 경우와 달리 6㎝가 넘지 않게 팠던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이 정도의 비석은 비각(碑閣·비석을 모시는 전각)을 세우기 때문에 건립 이후엔 파괴될 이유가 없고 아마 그 이전에 파손돼 수리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남산동에서 남산을 끼고 북쪽으로 향했다. 보리사에는 경북 영천에서 왔다는 한 보살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석조여래께서 영험하시다고 들었다. 참 잘 생기셨다”며 웃었다. 경주 남산의 불상 중 이 미륵곡 석좌여래좌상처럼 보물까지 이른 건 드물다. 대부분 불두(佛頭)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의 광배(光背·불상 뒤 광명을 상징하는 장식)가 수상했다. 광배에 새겨진 화불(化佛·작은 부처상)은 불상의 좌우에 있어야 하는데, 한 좌가 불두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광배에는 사선으로 ‘접합 자국’이 남아 있다. 불상 뒤로 돌아가 보면 이어 붙인 자국 위로는 원래 광배의 석재와 세월 차이가 확연한 석재가 붙어 있다.
박 교수는 “불상의 등에도 약사여래불이 새겨진 점을 고려하면 신라의 불자들은 탑돌이 하듯 불상을 돌며 기도를 올렸을 것”이라며 “그런데 저쪽(불상의 우측) 남산의 급경사에 웅크리고 있던 마사토가 쏟아져 내려와 광배가 쓰러지면서 윗부분이 날아갔다고 유추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화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불이 났다면 잘 생긴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석재가 열기에 팍팍 튀어나가 형체를 온전히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라의 석공들이 수리했을까. 박 교수는 “보시다시피 뭔가 허술하지 않으냐. 석공 기술의 정점에 있던 신라 때는 아닐 것”이라며 “불상 근처에 조선 시대 중수비(重修碑·수리 내용을 표시하는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당시 광배 윗부분을 수리하면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시 북쪽. 경주는 지금 가을 수학여행 시즌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1000년 넘은 유물들 앞을 메웠다. 경주 문화재 미스터리를 이어가고 싶다면 박물관의 신라천년보고에서 ‘경주 203’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석 조각이라고 해서 비편(碑片)이라고 부르는 유물의 고유 번호다. 황복사지 혹은 사천왕사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됐다. 앞뒷면에 글자가 있다. 그래서 비석의 일부로 보는 이유다. 그런데 앞뒷면 글자 방향이 서로 다르다. 게다가 두께는 4.5㎝에 불과하다. 20~25㎝인 신라 비석 두께에 턱없이 모자라다. 적어도 한쪽 면은 없는 셈 치자는 의도가 이 비편에 숨어있다.
박 교수는 “글자 방향과 얄팍한 두께로 봐서 파손된 이수(螭首·비석의 머리 장식)의 땜질 역할을 한 조각”이라고 단정했다. 그 이유로 그는 전서체 ‘지비(之碑)’로 양각된 한쪽 면을 주목했다. ‘지비’는 ‘아무개의 비석’이라는 뜻으로 이수의 중앙 하단에 새긴다. 만약 이 비편 다른 면에 음각된 ‘미판(未判)’ 글자가 최종 용도였으면 이수에서 떼어냈다는 뜻인데, 현대 기술로도 쉽지 않다. 때문에 ‘미판’ 부분을 다른 비석에서 가져와 뒷부분을 다듬어 ‘지비’를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탑 수리와 같은 순서로 A/S에 들어갔고, 또 수백 년 세월 속 비바람에 이 비편이 떨어져 나온 뒤 파손됐다는 게 박 교수의 말이다.
“허술한 접합, 신라의 석공 솜씨 아닌 듯”
수리 흔적이 남아 있는 신라 석조 문화재는 더 있다. 성덕왕릉 앞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의 떨어져 나간 부분에 급히 새긴 문양이 보인다. 특이하게도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에는 수리를 위해 넣은 석재가 네모난 홈 안에 남아 있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에도 수리 흔적이 있다.
신라 석공이 아니라 이후 다른 시대나 일제강점기의 석공이 수리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박 교수는 “새로운 왕조는 변방이 되는 전 왕조의 수도까지 가서 수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일본에서 신라 석공의 A/S 기법으로 수리한 예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고, 일제강점기에 이런 식으로 수리했다면 현재까지 땜질용 석재가 온전하게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황금빛이 바람에 술렁거려 퍼지는 보문들. 넘어가는 해마저 하루의 마지막인 듯 황금빛을 뿜어낼 때,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순간 일렁거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