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타이거즈의 영원한 7번, 이종범 이야기

한국 야구에서 가장 유명한 어록 하나를 꼽으라면 이 문장이 빠지지 않는다. 투수는 선동열이 제일 잘하고, 타자는 이승엽이 제일 잘하는데, 야구는 이종범이 제일 잘한다.

특정 포지션의 최고가 아니라 '야구'라는 종목 자체를 잘했던 선수. 치고, 달리고, 잡고, 던지는 모든 장면에서 관중을 일으켜 세웠던 남자. 등번호 7번이 광주에서 영구결번이 된 이유다.

1994년, 만화에서나 가능한 시즌

이종범을 설명할 때 모든 이야기는 1994년으로 수렴한다. 프로 2년차 유격수가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 113득점, OPS 1.033을 찍었다. 타율, 안타, 도루, 득점, 출루율 전부 리그 1위. 4할과 200안타를 눈앞에서 놓친 게 아쉬움으로 남을 지경의 시즌이었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숫자들에 근접한 유격수는 나오지 않았다.

단일 시즌의 반짝임도 아니었다. 1997년에는 타율 0.324에 30홈런 64도루로 KBO 최초의 트리플 스리를 달성했다. 3할-30홈런-30도루를 유격수가 해낸 것이다. 데뷔 시즌인 1993년과 1997년 두 번의 한국시리즈 MVP, 1994년 정규시즌 MVP, 골든글러브 6회. 해태 왕조의 마지막 불꽃은 사실상 그의 손에서 타올랐다.

일본에서 꺾인 날개, 그래도 돌아온 이유

1998년 주니치 이적은 '바람의 아들'이 태풍이 될 기회처럼 보였다. 실제로 이적 초반 일본 무대를 뒤흔들었지만, 그해 6월 한신전에서 상대 투수의 공에 팔꿈치를 맞아 골절되면서 모든 게 어긋났다.

부상 후유증과 스트레스 속에 일본 3시즌 반 동안 타율 0.261에 그쳤고, 원형 탈모까지 겪은 끝에 2001년 여름 KIA로 재창단한 친정으로 돌아왔다. 화려한 금의환향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 온 귀향이었다.

그런데 이 좌절이 이종범 서사의 끝이 아니라 2막의 시작이었다. 서른셋이던 2003년 20홈런-50도루로 당시 최고령 20-20을 달성했고, 2006년 WBC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일본전에서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결승 2타점 2루타를 터뜨렸다.

한국 야구사 최고 명장면 중 하나로 남은 그 타구다. 통산 성적은 1,706경기 타율 0.297, 1,797안타, 194홈런, 510도루. 일본에서 날린 4년을 빼고 쌓은 숫자라는 게 이 기록의 진짜 무게다.

전설의 이름값, 그 무게에 대하여

은퇴 후의 길은 현역 시절만큼 매끄럽지 못했다. 한화와 LG에서 코치와 2군 감독을 지내고 텍사스 마이너 연수까지 다녀오며 지도자 수업을 쌓았지만, 지난해 KT 코치 재직 중 시즌 도중 예능 '최강야구' 감독직을 위해 팀을 떠나며 큰 비판을 받았다.

프로그램은 올해 초 종영됐고, 이후 현장 복귀 의사를 밝힌 것을 두고도 여론은 싸늘했다. 본인 스스로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인정한 이 선택은, 전설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은퇴 후에도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현재는 8년 만에 MBC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고 있다.

그래도 7번은 7번이다

공과를 다 놓고 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한국 야구에서 '공수주 5툴'이라는 말이 나올 때 가장 먼저 소환되는 이름은 여전히 이종범이고, 그의 야구를 직접 본 세대는 지금도 그 시절을 행운이라 말한다는 것.

아들 이정후가 아버지를 넘어섰다는 평가 속에 메이저리그를 누비는 지금도, "그래도 전성기 임팩트는 아버지"라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 자체가 그 위상의 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