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지키며 삶에서 퇴장할 권리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우리는 종종 쉽게 잊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의 유한성 안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 사회 전반을 둘러싸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문제를 넘어 '존엄을 지키는 죽음'을 향한 논의가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변화일지 모른다.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살아온 여정의 끝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룸 넥스트 도어》는 시종 죽음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죽음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전체의 죽음도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유유히 흐른다.
영화에는 생이 저물어가는 것에 대한 어둡고 음울한 기운이 아니라, 빛나는 생의 감각들이 가득 드리워져 있다. 살아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자각하게 만드는 죽음의 역설 덕분이다. 영화는 알모도바르 감독이 만든 첫 영어 장편영화로, 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 소설 《어떻게 지내요》가 원작이다. 기본적 얼개는 같지만 꽤 많은 부분을 각색하고 추가했다.
죽음을 향한 사색적 대화의 여정
최근 신간을 낸 작가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사인회에서 우연히 옛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의 소식을 듣게 된다. 지금은 연락이 뜸해진 마사가 뉴욕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암 투병 중이라는 것이다. 병문안에서 만난 마사는 암 말기 환자의 병색이 완연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지성을 소유한 대화 상대다. 두 사람은 수시로 만나 젊은 시절의 기억,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는 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일, 가장 최근의 생각들까지 폭넓게 대화를 나눈다. 변곡점은 마사의 부탁으로부터 나온다. 스스로 생을 정리하는 순간에 그저 옆방에 있어 달라는 부탁. 죽음을 두려워하는 잉그리드에게는 혼란스러운 제안이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로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이 같은 수상 소감을 남겼다. "이 세상에 깨끗하고 품위 있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라고 믿는다. 이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모두가 자기 경험의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존엄한 죽음은 인간의 기본권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알모도바르를 《룸 넥스트 도어》의 메가폰을 잡도록 추동했다. 그의 고국인 스페인은 2021년 3월부터 존엄사를 합법화했다.
영화는 죽음을 말하되 그것이 장엄한 슬픔이 아닌 평화의 안식이 될 수 있는 과정을 제시한다. 마사가 불법적인 루트로 약을 구한 이유는 "존엄을 지키며 퇴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사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던 인생 전체의 시간을 죽음이 망쳐버리지 않도록, 나라는 사람을 질병이 원하는 모습으로 해치지 못하도록 하려 한다. 떠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있는 게 실망스러울 정도라는 마사의 단호한 태도와 달리, 마지못해 그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잉그리드의 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득하다.
상반된 입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덕분에 영화에는 신선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잉그리드와 마사는 뉴욕 외곽의 한적한 공간으로 '계획된 여행'을 떠난다.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멋진 휴가지에 어울릴 법한 공간이지만, 자신에게 익숙한 물건이 가득한 공간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마사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닫힌 문'은 마사가 결심을 실행했음을 뜻하는 두 사람 사이의 표식이다. 잉그리드는 매일 아침 계단을 오르며 간밤에 위층에서 잠들었을 마사의 방문을 확인한다. 닫혀 있을 것인가, 열려 있을 것인가.
원작의 제목인 《어떻게 지내요》는 결국 '당신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는 질문의 다른 표현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을 헤아리는 일에 다름 아닐 수 있다. 이성적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적 차원의 이해심과 공감을 바탕으로 곁에 있어주는 것만이 최선의 배려일지 모른다. 죽음을 둘러싼 마사와 잉그리드의 기이한 동행은 이 같은 관계의 진리를 말한다. 팬데믹 시기의 고립을 경험한 것 역시 감독을 《룸 넥스트 도어》로 이끈 결정적 계기 중 하나로 느껴지기도 한다. 외부의 위협이든 개인적 사안이든, 고립될 수밖에 없는 고통 속에서 누군가와 동반한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두터운 위안이다.
나란한 두 배우의 얼굴만으로도 깊은 여운
인생의 황혼기에는 삶의 전체를 되감기하는 숙명이 주어지는 걸까. 인간 본성과 감정에 대한 탐구로 아름답지만 문제적 작품들을 선보였던 알모도바르 감독은 최근 몇 년간 《페인 앤 글로리》(2019) 등에서 인생의 고통과 영광의 순간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성찰하는 시각을 보여줬다. 그리고 《룸 넥스트 도어》에 이르러 훨씬 구체적인 방식으로 죽음 그 자체를 대하고 있다.
잉그리드와 마사의 지적이고 사색적인 대화의 여정 안에서 마사의 육체는 생명력을 잃어가지만, 영화는 더욱 생생한 최선의 감각으로 그의 마지막을 전달한다. 알모도바르의 인장과도 같은 총천연색 색감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가운데 데이비드 호퍼와 루이스 브루주아의 미술작품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죽은 사람들》 등을 풍성하게 경유하는 주인공들의 문화적 여정은 깊은 감흥을 남긴다.
극 중 눈이 내릴 때마다 마사의 읊조림을 통해 발화되는 제임스 조이스의 문장은 특히 오래 휘발되지 않는 여운이다. '우리 모두 차례로 그림자가 되어간다 / 눈이 내린다 / 마이클 퓨리가 잠든 쓸쓸한 교회 마당에도 온 우주를 지나 아스라이 내린다 / 그들의 최후의 종말처럼 /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예술은 삶을 위로하는 것을 넘어, 죽음을 향한 공포를 다독인다.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진 구성 덕분에 종종 2인 연극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두 사람의 재회엔 그간의 시간을 메우는 기능적인 장면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으며, 분절적으로 제시되는 마사의 회상 장면은 현재를 압도할 만큼 인상적이거나 필요 이상의 거창함으로 보이기를 반복한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번역 덕분에 영어 대신 감독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쓰인 각본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여겨지는 장면도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은 틸다 스윈튼과 줄리앤 무어가 나란한 풍경 그 자체라는 것이다. 특히 창백하고 신비로운 틸다 스윈튼의 얼굴은 텅 비었다가도 금세 모든 색채를 흡수하는 캔버스처럼, 혹은 영화 내내 알모도바르가 탐미적으로 탐구한 대상처럼 보일 정도다. 단편 《더 휴먼 보이스》(2020)로 처음 호흡을 맞춘 알모도바르 감독과 틸다 스윈튼은 잉그리드를 연기할 배우로 줄리앤 무어가 유일한 선택지라는 데 뜻을 모았고, 무어는 특유의 지적이고 따뜻한 이미지로 영화 전체를 감싸 안는다.
극 중에서 한때 차례로 마사와 잉그리드의 연인이었던 데이미언(존 터투로)이 잉그리드와 대화를 하다 그에게 전하는 말은, 마치 배역 너머의 줄리앤 무어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면서 고통을 겪는 법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야."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